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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드림 hd books May 13. 2019

한샘국어 서한샘 선생님과 묻어둔 사연 하나

스물여섯이었다. 가진 게 전혀 없어도 두려울 게 없을, 생각만 해도 가슴 떨리는 나이였다. 하지만 태생적으로 나는 소심하였다. 아마 어릴 적부터 짓눌린 가난과 권위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군 제대를 한 다음 해, 뒤늦게라도 대학을 가기 위해 공부를 하던 그때 서한샘 선생님을 당시 서대문 한샘학원에서 만났다. 독서실에서 공무하다 알게 되어 뭉치게 된 나보다 두 살, 세 살 터울의 형들과 선생님의 강의를 들은 것이다. 입시학원에서는 한마디로 ‘노땅’들이었다.

우리는 언제나 맨 앞자리에서 강의를 들었다. 수강생이 2~3백 명이 되었지만 우리 자리는 언제나 예약되어 있었다. 학원에서 선생님 수업을 도와주며 공부하던 학생들이 나이 든 우릴 특별히 배려해 늘 자리를 잡아두었기 때문이다. 

서울학원의 성문종합영어 조응호 선생님이나 대일학원의 수학 정석 김일 선생님 등 시내 유명학원 단과반 강의를 찾아가며 듣던 어느 날, 두 형에게 나는 기발한 제안을 하였다. 워크맨이나 아이와 카세트가 한창 유행하던 때였다. 여기저기 학원을 다니며 두 번 세 번 강의를 들을 게 아니라 영·수·국 등 주요 과목 강의를 녹음하여 조용한 우리 시골집으로 내려가 강의 테이프를 반복해 들으며 공부하자는 아이디어였다. 그때만 해도 인강은 물론 현장 강의 테잎은 없었다. 

두 형이 흔쾌히 동의해 우리는 서한샘 선생님 강의를 녹음하였다. 선생님도 녹음이 궁금하였던지 이것저것 물어와 우리 계획을 알려드렸다. 종종 선생님이 급한 사정이 생겨 휴강을 하게 되면 선생님은 우리가 녹음한 강의 테잎을 틀어 복습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후 선생님도 당신 강의를 녹음하게 되면서 대입학원 현장 강의 테잎은 점차 유행처럼 번지게 되었다.      

 

나는 수학은 절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수학 포기는 내 인생에서 여러 가지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오로지 국어와 영어 점수로만 대학을 들어가야 할 판이었다. 다행히 한샘국어로 다진 내 국어 점수는 높았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국어와 친근해진 내가 만날 교정과 윤문에 시달려야 하는 출판사를 운영하게 될 줄은 몰랐다. 더불어 문학을 하고 있으니 내 삶에서 국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큰 셈이다, 

서한샘 선생님도 선생님이지만 한샘학원에서 만난 Y로 인해 나는 오랫동안 지독한 몸살을 앓았다. 어느 날 학원에서 아는 이를 위해 내 옆자리를 하나 잡아두었는데, 마침 그가 결강을 하여 Y에게 내 준 것이 인연이 되었다. 이후 나는 자리를 잡아주는 학생에게 부탁을 하여 Y는 항상 나와 나란히 앉아 서한샘 선생님의 강의를 들었다. Y가 내 옆자리를 고정석처럼 차지하자 ,내 주변에는 알게 모르게 자리 쟁탈전이 벌어지곤 하였다. 다들 그녀와 가까이 하고 싶어 안달을 하였다고나 할까. 하얀 피부와 긴 머리를 지녔던 그녀는, 스무 살 또래 여자아이들보다 세련된 차림이었다. 무엇보다 수줍은 듯 웃는 모습이, 볼 때마다 가슴을 설레게 하였다. 

선화예고를 나와 고척동 성당에서 성가 반주를 하였던 Y는 나보다 여섯 살 아래였다. 훗날 내가 성당을 다니게 된 것도 그녀와의 인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척동은 우리 해드림출판사와 가까운 곳이어서 자주 고척돔구장 등을 지나치는데, 지금도 수십 년 전 그녀가 떠오르곤 한다. 아마 세상이 끝나기 전에는 지워질 수 없는 기억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고향에서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 생활을 하였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시골틱한 내게 Y는 가까이 할 수 없는 상류층 가정의 귀한 딸처럼 느껴졌다. 마치 처분만 바라듯 매사 그녀에게 자신이 없었던 이유였다. 

태어나 처음 받아본 초콜릿, 그녀를 통해 발렌타인데이를 알았다. 손수건이며 책 등을 선물로 건넸지만, 나는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빠져나오려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 깊이 빨려가는 늪처럼, 내 영혼은 그녀에게 무기력하게 사로잡혀 버렸다. 

한샘국어 종강이자 주요 과목 녹음을 마친 날이었다. 이제 시골로 내려가는 일만 남겨두게 되었다. 나는 한샘학원 근처 찻집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하지만 약속시간 한 시간이 지나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두 시간째 그녀를 기다렸다. 점점 허무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래도 일어설 수는 없었다. 절망이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다시 한 시간이 더 흘렀다. '삐삐'나 핸드폰 등장 전이었다. 계속 기다려야 할 거 같았다. 

세 시간이 훌쩍 지났을 무렵 그녀가 땀을 흘리며 나타났다.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내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고 하였다. 왜 늦었는지 그녀가 이유를 설명해주었는데 지금은 기억이 희미하다. 이유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그녀와 마지막 만남이었을지라도, 약속 장소로 나와 주었다는 사실만으로 내 영혼에서는 벚꽃이 분분하게 휘날렸다.       


시골로 내려가 대학 입시를 준비할 때도 좀처럼 집중할 수가 없었다. 목표를 둔 대학을 들어가야 그녀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중압감이 매번 악몽을 꾸게 하였다.     

끝내 원하는 대학은 갈 수 없었다. 바탕이 허약한 검정고시 출신의 약점이 그대로 드러났다. 대입검정고시를 합격하자마다 입대를 하여 33개월이라는 공백이 생겨버렸으니 고등학교 공부라고는 제대 후 입시학원 시절 딱 8개월이 전부였다. 나는 도망치듯 서울을 떠나 지방으로 내려갔다. 대학 생활 내내, 대학 졸업 후 오랫동안 사법시험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그녀를 향한 그리움은 혼불처럼 빙의되어 있었다. 

진관외동 고시원에서 옥수동까지 소나기를 맞으며 밤길을 걸어보아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녀와의 넘을 수 없는 경계가 제대로 연락 한 번 해볼 용기조차 없애 버렸다. 길을 걷다 그녀와 닮은 여자만 봐도 숨이 멎을 듯하였다. 지독히 폐쇄적인 고시원 생활이 더욱 그녀를 그립게 하였다. 

절대 잊을 수 없을 거 같던 그녀도 사법시험 포기와 형과 누이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서 스멀스멀 잊혀 갔다. 적어도 내게는 여신이었던 Y는 한편으론 힘이 되었다. 아무 보잘 것 없는 내가 누구도 쉽게 넘볼 수 없는 착한 미인과 잠시나마 인연을 맺을 수 있었던 사실은 혼자 만들어 낸 아픔을 견뎠지만 감사한 일이었다.     


며칠 전 서한샘 선생님이 별세 하였다는 기사를 읽었다. 올해 연세가 어찌 되었나 싶어 보니 이제 70대 중반이다. 요즘은 그 연세면 한창 일하기도 하는데 지병이 있으셨던 것일까, 안타까운 마음이 들썽거렸다. 

Y도 서한샘 선생님 별세 소식을 읽었을지 모르겠다. 내 존재야 까맣게 잊었겠지만 스무 살 시절 한샘학원과 선생님은 기억할 것이다. 

선생님의 부음소식을 들으니 국어로 맺어진 내 삶의 자취들이 마치 연결 고리인듯 떠오른다. 한샘국어와 서한샘 선생님 그리고 한샘학원에서 알게 된 Y, 전혀 뜻밖의 출판사를 운영하며 매번 출간 원고에 사로잡혀 사는 나의 출판 인생과 무슨 인연이라도 되었는가 싶다.      


* 서한샘 선생님의 영원한 안식을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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