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모하는 여인을 바라보듯 4년 째 훔쳐보는 빌딩이 있다. 그래선지 어느 새 정이 들었다. 깎아지른 빌딩들 틈새에서 도시의 수호신처럼 서있다. 때로는 건장한 남자들을 다스리는 여신 같기도 하는데, 각진 세상을 누그러뜨리며 동글게 둥글게 하늘을 향해 솟아있다.
누구나 꿈을 꾼다. 다소 이루기 어려운 꿈일지라도 그 꿈이 자신을 추슬러 주는 힘이기도 하다. 나는 신도림 쉐라톤 디큐브시티 호텔 빌딩을 보면서 우뚝 서고픈 꿈을 꾼다. 40층이 넘는 이 빌딩은 내 스마트폰 배경 사진이기도 하다. 스마트폰을 열 때마다 둥근 태양의 건물이 나를 자극한다.
지난겨울 새벽마다 신도림 남부역 인근 사우나로 운동을 다녔다. 운동을 마치고 나오면 햇살이 휘어 감싼 호텔 먼발치에서 희붐하게 상상을 하곤 하였다. 호텔 빌딩의 높은 창가에 서서 세상을 향해 퍼져오는 동살의 기운을 받는 나를 그려보는 것이다. 무엇보다 오금 저리게 하는 생각은,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겨울 아침의 따뜻한 시간을 맞는 동경이다. 호텔 동쪽 마을은 지형이 낮고 앞을 가리는 건물이 없어서 멀리 보이는 관악산까지 훤히 트였다. 이 빌딩에서 보는 도시의 일출은 꽤나 감탄스러울 것이다.
나는 유독 겨울을 싫어한다. 세 번이나 사랑하는 가족과 사별의 겨울을 겪은 데다 가난한 내 삶을 겨울은 오랫동안 할퀴곤 하였다. 이런 까닭인지 겨울이면 우울한 날이 잦았던 나는 늘 환한 햇살이 그리웠다. 호텔 7부 능선을 휘감은 겨울 아침 햇살은 바로 내 꿈이었다.
‘둥글게 우뚝 서서 겨울 아침 햇살을 맞이하는 꿈’인 것이다.
이 호텔 빌딩을 여유롭게 바라보는 곳은 해드림출판사 사무실이 있는 11층 베란다와 12층 옥상이다. 타원형 빌딩이 원(圓)으로 보이는,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지점이다. 일을 하다 잠시 옥상으로 올라가면, 건너뜸 호텔 빌딩에서 산허리를 감싼 안개처럼 생각이 우럭우럭 피어난다. 단순 고층 빌딩이 아니라 소소한 풍경을 연출하며 허공을 휘감은 자태를 뽐낸다. 김포공항을 향하는 비행기들이 몸을 낮추며 빌딩 뒤편으로 사라졌다가 나온다. 호텔 시선을 피할 수 없듯, 언제 어디서나 고개를 들면 마주친다. 사무실 서쪽 발코니와 옥상에서는 물론이요. 문래동 철공작소 마을에서도 마주한다. 골목길에 빗물이 고이면 그 고인 물속에서도 만나고, 늦은 밤 도림천을 산책할 때면 고요히 가라앉은 물낯의 수채화로도 나타난다. 때로는 꼭대기가 안개로 싸여 있어 그 위용을 드높인다. 빌딩을 바라볼 때마다 꿈틀거리는 생명처럼 가슴 속에서 내 꿈이 자맥질을 한다.
원(圓)의 미학을 떠올리게 하는 빌딩이다. 가까이서 보면 타원형이지만 이 빌딩의 탁연한 매력은 곡선이라는 데 있다. 아무데서나 볼 수 없는 40여 층 곡선 빌딩이 원의 기운을 발산하며 우꾼하게 서있다. 빌딩 안에도 원의 기운이 가득 흐를 것이다. 주변은 온통 각(角)의 숲이다. 곡선의 힘에서 나오는 기운이 사방에서 뻗친 각의 세계를 다스린다.
우주는 원이다. 세상을 지배하는 해와 달이 원이요, 미의 상징인 모든 꽃도 원을 지향한다. 각이 매정하게 밀어내는 느낌이라면, 원은 붙들어주며 품어준다. 원은 또 여운의 기다림이다. 둥근 호텔 빌딩은 그리하여 기다림의 상징이기도 하다. 재촉하고 채근하는 직선의 각은 나만 앞세우는 성질이다.
하루하루가 두려운 일상에서, 또는 일에 파묻혀 늘 긴장하여 있는 일상에서 한 템포 기다려주는 것, 한 템포 늦추어 주는 기다림은 상대에게 행복을 주는 일이다. 기다려준다는 것은 나에게 여운을 두게 하므로, 상대를 내게 오래 머물게 한다. 세상 사람들을 기다리며 서 있는 듯한 호텔 빌딩은, 그래서 자꾸만 내 마음을 끌어들인다. 나의 사랑 하느님도 기다려주시는 현존이다. 수십 년 멀리 떨어져 있었어도, 내가 죄악 가운데 있어도, 어둠에게 사로잡혀 있어도 언제나 애틋하게 나를 기다려주신다.
이 빌딩에서 휴식을 취하며 얻는 기운은, 각의 빌딩에서 얻는 기운보다 생기로울 것이다. 세상에서 받은 까칠한 것들은 원의 공간에서 훨씬 잘 풀릴 듯하다. 아이디어도, 지혜도 이 공간에서 더 충만해지지 않을까. 이곳에서 외국 바이어들과 만나면 갈등 없이 원만하게 계약이 성사될 듯하다. 갈등이 심한 일일수록 원의 빌딩에서 마음을 맞대면 매사 순조롭게 풀리지 싶다. 매일 짐승처럼 부부 싸움을 해도 이곳에서 하룻밤 자고 나면 마음이 둥글어져 있을 것이다.
자꾸만 각이 되어 가는 세상도 원의 세상으로 바뀌었으면 한다. 생각이 둥글면 삶이 둥글어진다. 직선으로 들어오는 말을 잠시 궁굴리어 둥글게 건네주는 원의 미학이 내 삶의 철학이 되길 원한다. 사람의 몸도 마음도 원의 순리이다. 웃음이 가면 웃음이 오고, 화가 가면 화가 온다.
치명적인 화살을 주고받듯 사무실에서 함께 일하였던 우린 숱하게 서로를 향해 화살을 쏘아댔다. 시위를 당길 만큼 당겼다가 주저 없이 놓았다. 화살이 심장을 관통하듯 직선으로 파고들면 한쪽은 반사적으로 맞받아쳤다. 우리가 싸울 때면 함께 일하는 동료가 경기(驚氣)를 일으키며 주저앉을 정도였다. 직선은 여과 없이 들어오고 여과 없이 나갔다.
하지만 지금 그녀와 나는 꽤 둥글어져 있다. ‘나처럼 우뚝 서려면 네가 둥글게 바뀌어야 한다.’고 쉐라톤 호텔 빌딩은 말한다. 호텔 빌딩을 소유한 이는 항상 세상을 둥글게 바라보며 직선의 권위보다 완만하고 온유한 겸손을 지녔으리라 생각한다.
우리 해드림출판사가 쉐라톤 호텔 가까이 있어서 힘을 얻는다. 일상에서 오는 근심이 회오리 할 때마다 옥상에 올라 호텔 빌딩을 바라보며 ‘잘 될 거야’를 되뇐다. 그러면 마음이 좀 둥글어지며 가라앉는다.
해드림출판사의 ‘해드림’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해꿈(SUN DREAM)이다. 해꿈은 단순히 베스트셀러를 상징하는 것뿐만 아니라, 아침 햇살 같은 삶의 기운을 세상 구석구석 비추는 꿈이기도 하다.
둘째는 해들임을 풀어쓴 것이다. 호텔 빌딩의 아침처럼 해를 안으로 들인다는 뜻이다. 어둠을 몰아내는 것이다. 저자와 독자 그리고 우리 출판사 모두의 소망이다. 저자와 독자와 출판사를 축복하는 그분의 빛이 끈히 충만하기를 소망하는 뜻도 있다. 따라서 신앙적으로는 성령을 뜻하기도 한다.
셋째는 MAKE이다. 책을 만든다는 장인 정신, 즉 예술 정신을 담았다. 내 스스로가 예술적인 삶을 지향한다.
쉐라톤 서울 디큐브시티 호텔이 주는 ‘둥글게 우뚝 서서 겨울 아침 햇살을 맞이하는 꿈’은바로 우리 해드림의 꿈을 담고 있다. 그래서 더 정감이 간다.
한 번도 가보지는 못하였지만 28층에는 세계적인 '아쿠아리스(Aequalis)' 브랜드 스파가 있다고 들었다. 사우나를 즐기는 노모와 꼭 한 번 이곳에서 휴식을 보내고 싶지만 노모 살아생전 다녀올 수 있을지 마음만 조급해진다. 하지만 꿈꾸는 시간만큼 행복도 즐긴 셈이다. 시시로 호텔 빌딩을 바라보며 ‘둥글게 우뚝 서서 겨울 아침 햇살을 맞이하는 꿈’이 이루어질 때를 기다리며 이른 새벽 사무실에서 눈을 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