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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드림 hd books May 25. 2019

조정래 선생의 고향 순천에는 왜 조정래 공간이 없을까

조정래 문학기행 루트를 생각하며

조정래 문학기행 루트: 서울-김제 아리랑문학관-순천 선암사-벌교 태백산맥문학관-고흥 가족문학관     


순천시와 조정래 선생을 떠올리면 아쉬운 생각 하나가 ‘순천시는 왜 조정래 문학 공간을 조성하지 못하였을까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문호들은 대개 자신이 태어난 고향에 생가와 더불어 문학관이 있기 때문이다. 외지 문인을 모셔온 지방자치단체도 있다.


순천에는 순천만 정원, 순천만 갈대밭, 승보사찰 송광사, 태고종(太古宗) 본산인 선암사(仙巖寺) 등 굵직굵직한 관광지가 있고, 관광객도 부쩍 늘었다. 여기다 대한민국 문학의 거장 조정래 공간을 갖췄다면 금상첨화였을 텐데 아쉽기만 하다. 

벌교의 태백산맥문학관(선생은 광주 서중 입학 전 초등학교 4학년부터 6학년 때까지 벌교에서 살았다.)이나 김제의 아리랑문학관이야 작품 무대이니 그렇다 해도, 조정래가족문학관조차 고흥군에서 조성하였으니 참 할 말이 없다. 조정래가족문학관 공식 명칭은 ‘조종현·조정래·김초혜 가족문학관’으로 2017년 11월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에서 개관되었다.     


순천에 조정래 선생 이름을 볼 수 있는 곳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소설 태백산맥이 이적성 논란 등 거의 11년 동안 온갖 시련을 견디다가 2005년 해금된 직후, 순천시는 857번 국도 승주 죽림에서 낙안 구기까지 약 20여km 길을 ‘조정래길’이라 명명하고, 그 길을 알리는 표지석을 낙안면 낙안읍성 입구에 세웠다.  ‘조정래길’에 위치한 모든 집 대문에는 ‘조정래길 00번지’라는 도로명이 붙어 있다. 하지만 길 존재 그 자체일 뿐 조정래 선생을 토대로 한 활동이나 행사는 없는 것으로 안다.   

   

시조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선생의 아버지 조종현 스님은, 일본 유학 후 선암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조정래 선생은 승주읍 선암사에서 태어난, 순천이 고향인 분이다. 벌교를 선생의 고향으로 아는 사람들도 있다. 아마 벌교읍 회정리에 있는 조정래 선생의 생가(어린 시절, 초등학교 4학년부터 6학년 때까지 살았던 집)의 푯말 때문일 것이다.

선생의 아버지 조종현 스님은 고흥군 남양면 왕주리 출신이서, 고흥군이 ‘철운 조종현 선생’의 삶과 문학을 조명하는 사업을 추진한 것을 계기로 가족문학관까지 조성하게 되었다. 


조종현 스님은 4남 4녀를 두었는데 그 중 차남이 조정래 선생이다. 13세 때 귀의하였던 스님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불교를 장악하기 위해 종교 황국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그 방법의 하나로 젊은 승려들을 결혼시켜 일본식 ‘대처승’을 만들었다. 

한국전쟁 후 스님은 교육계에도 종사하여 18년간 벌교상고 국어선생님을 비롯하여 중고등학교 교사 및 교장을 지냈다. ‘스님 선생님’이었던 것이다. 법화종 초대이사, 동국대 이사, 조계종 고시위원 등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우리가 고등학교 때 교과서에서 배웠던 그 유명한 시 ‘나도 푯말이 되고 싶다’가 바로 조종현 스님의 작품이다.     


나도 푯말 되어 살고 싶다

    조종현(趙宗玄)     


나도 폿말 되어 너랑 같이 살고 싶다

별 총총 밤이 들면 노래하고 춤도 추략

철 따라 멧새랑 같이 골 속 골 속 울어도 보고.    


오월의 창공보다 새파란 그 눈동자

고함은 청천벽력 적군을 꿉질렀다

방울쇠 손가락에 건 채 돌격하는 그 용자.     


<중략>

네가 내가 되어 이렇게 와야 할 걸

내가 네가 되어 이렇게 서야 할 걸

강물이 치흐른다손 이것이 웬 말인가.   

  

향 꽂고 삼귀의, 꽃 드리고 묵념이요

바라밀경 오이며 나즉이 정례하고

원앙생 축원 올리며 다시 합장하느니.

   

지방자치단체마다 작고한 문인들은 물론이고, 청송군의 객주 김주영 문학관처럼 생존해 있는 거장 문인들의 문학관을 지어 다채로운 행사를 하는데, 유독 내 고향 순천시는 문학에 대한 관심이 없어 보이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조정래 선생을 생각하면 선생이 태어난 선암사를 빼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선암사는 불경의 최고봉을 이룬 학승 경운 스님이 당대 강학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래서 선암사에서는 ‘문장을 자랑하지 마라’는 말이 있다. 어쩌면 조정래 선생은 이런 기운을 받아 태어났는지 모른다. 

서울에서 시작하여 김제의 아리랑문학관, 고향인 순천-벌교 태백산맥문학관-고흥 가족문학관으로 이어지는 조정래 문학기행을 고려한다면, 순천시에선 무엇을 보여주어야 할까. 순천시와 고향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선생의 조언을 얻어 공간 하나 조성하였으면 한다.  


그나저나 우리 해드림출판사는 언제 순천의 자부심이 될 수 있는 출판사로 성장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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