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KBS2 프로그램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를 보다가 우리나라 최고의 스토리텔링 마을이다 싶은 반월도를 알았다. 다름 아닌 퍼플(보라색) 섬마을, 마을을 보라색으로 입혀버린 신안군의 스토리텔링 안목이 아주 돋보였다. 색 하나 입혔을 뿐인데 섬마을이 신비로운 동화처럼 변해 있었다. 여기서 더 놀라운 것은 주민들의 협조이다. 군에서 처음 보라색 마을을 만들자고 하였을 때 주민들은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는 반응을 하였을지 모른다. 방송에서 보이는 주민 대부분은 여느 시골 어른들처럼 생각이 완고해 보임직한, 나이 지긋한 세대였다. 주민의 적극적 참여가 없다면 저리 아름다운 마을이 탄생하였을까.
사진출처 신안군청 반월도의 모든 집의 지붕은 보라색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이 든 주민들도 모두 보라색 점퍼를 입었고, 심지어는 양말도 보라색이었으니 마을과 사람들이 보라색으로 동화되어 있었다. 차량도 보라색이었다. 워낙 강렬한 보라색이 섬을 점령하여 다른 색깔은 도통 눈에 띄지를 않았다. 농작물도 빨간무(자르면 적색 띤 보라색)라 불리는 비트를 재배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보라색 도라지꽃이 많이 핀다고 하였다. 도라지꽃 이외도 숙근 아스타(New England aster)도 가을이면 지천에 피는 모양이었다.
보라색만큼 고급스럽고 아름다운 색깔도 드문데, 여름에 피는 도라지꽃(청도라지라고도 부름)을 보면, 보라색이 주는 신비감 이외도 깊은 사연이 담긴 듯한 느낌을 준다. 꽃이 터지기 전의 도라지 꽃봉오리는 마치 무언가를 소중하게 감싼 보자기 같기도 하다.
어떤 스토리와 그 스토리와 연관된 콘텐츠가 사람들을 감동하게 해서 어떤 행동을 하게 만드는 것을 스토리텔링이라 한다면, 퍼플섬 반월도는 훌륭하고 아름다운 스토리텔링을 입힌 섬이다. 도라지꽃(스토리)과 콘텐츠(보라색을 입힌 마음)가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들여 관광지로 거듭난 것이다. 연인들의 섬이라 불리면 좋을 듯한 반월도는 머잖아 부자마을이 되지 싶다.
기왕 도라지꽃에서 퍼플섬이 비롯되었다면, 도라지꽃 전설도 스토리텔링 구성 요소로 넣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전설을 입힌 도라지길이랄까 ….
반월도에는 도라지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가 있었다. 부모가 없던 도라지는 먼 친척 오빠와 함께 살았다. 가난한 섬마을에서 오빠는 도라지부터 챙겼다. 친누이처럼 아껴주며 돌봐 준 오빠를 도라지도 무척 따랐다. 오빠는 고기잡이를 도와주며 얻어온 생선을 구워 언제나 도라지를 배불리 먹였다. 추운 겨울 날 고사리 같은 손으로 빨래를 하려는 도라지를 만류하며 손수 빨래도 하여 널던 오빠였다. 아궁이에 불을 땔 때도, 굴을 따러 갈 때도, 나무를 하러 갈 때도 오빠는 도라지를 붙이고 다녔다. 다만 모든 일은 오빠가 하였다. 동네 사람들은 저들이 자라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부가 될 거라고 수군거렸다.
흉년이 지독하게 이어지던 어느 날, 오빠가 도라지를 불러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앞으로 한동안 너와 헤어져 있어야 할 것 같구나. 너도 알다시피 여기서는 먹고 살기가 너무 어려워. 그래서 중국으로 가려고 해. 그곳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구나.”
금방 눈물이 갈쌍해진 도라지가 물었다.
“오빠. 그럼 언제 돌아와?”
“응, 한 10년 쯤 걸릴 거야. 오빠가 없어 힘들겠지만 스님들 말씀 잘 듣고 있으면 꼭 성공해서 돌아올게.”
오빠 없이는 살 수 없을 거 같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후 오빠는 배를 타고 중국으로 갔다. 도라지는 오빠가 맡긴 절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오빠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도라지는 틈만 나면 절 뒤편의 언덕으로 올라가 오빠가 떠나간 바닷길을 망연히 바라보곤 하였다. 오빠를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움으로 변해갔다. 한설과 바닷바람이 몰아쳐 살결을 할퀼 때에도 그리움은 부풀어갔다. 하지만 오빠는 10년이 훌쩍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밤이면 달빛이 바다 위로 쏟아내는 윤슬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저 멀리 어슴푸레한 그림자만 비쳐도 가슴이 사무쳤다.
그러던 언제부턴가 오빠가 타고 오던 배가 풍랑을 만나 뒤집혔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소문은 소문일 뿐, 도라지는 오빠가 틀림없이 돌아오리라고 믿었다. 어느새 10년이 더 흘렀다. 도라지는 자신이 기거하던 절의 스님이 되어 그곳을 지키며 오빠를 기다렸다. 도라지가 치는 목탁소리는 어둠 속의 섬을 애절하게 감쌌다. 승복이 흥건히 젖도록 밤을 지새우며 부처님에게 천배를 올려도 오빠를 향한 번뇌는 떨쳐낼 수 없었다. 세월이 덧없이 흘러 머리가 하얗게 세었어도 도라지의 마음은 변치 않았다.
이제 입적할 날도 멀지않은 어느 여름날이었다. 도라지는 여느 때처럼 언덕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수심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등 뒤에서 누군가 도라지를 불렀다.
“도라지야, 도라지야”
“얘, 도라지야, 오빠가 왔다.”
오빠라는 말이 그녀의 온몸을 전율시켰다. 차마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뒤를 돌아보면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았다. ‘오빠라니….’ 도라지는 눈을 감은 채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 순간 도라지는 꽃으로 변하고 말았다. 평생 오빠를 기다리는 모습을 너무나 처연하게 여긴 부처님이 도라지를 꽃으로 환생시켜 영원히 세속에 남게 한 것이다.
도라지꽃의 꽃말은 영원한 사랑 또는 소망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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