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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드림 hd books Feb 16. 2021

TV조선 ‘미스터트롯’…니들이 효자다

어둠이 내리자 봄비가 쏟아졌다. 기와지붕이나 차양, 마당 가 비닐하우스 등을 두드리며 빗소리가 집안 깊숙이 스며들어 밖으로 나를 밀어낸다.

손가락 통증이 있어 설거지하기도 힘들어하는 어머니를 홀로 두고 내일이면 또 상경을 해야 한다. 토방에서 어수선한 마음을 봄비에게 맡긴 채 한참 서 있자니 갑자기 사방 불빛이 사라져 버린다.

비가 온다고 정전이 되는 시골이라니....


십 분쯤 지나자 다시 전기가 들어왔다. 하지만 TV는 수신이 잡히지 않아 계속 먹통이었다. 어머니 말로는 케이블 방송 회사에서 손을 써야 나온다는 것이었다. 저녁 시간이면 TV 앞에서 시간을 보내는 어머니에게 갑자기 고립이 찾아온 듯하였다. 아무래도 어머니 방에서 시간을 보내야 할 거 같아 생각한 것이 술상이었다. 어머니야 술을 안 드시지만, 나 혼자 홀짝홀짝 마시며 어머니 말동무를 해드릴 참이었다. 

TV 곁에는 어머니 60대쯤 제주 관광에서 말을 타고 있는 사진이 놓여 있었다. 젊고 건강해 보이는 고운 모습이었다. 내가 당신 젊은 날 이야기를 꺼내자 어머니는 한창 지난날 이야기를 쏟아냈다. 나는 어머니와 이야기를 할 때면 항상 맞장구를 친다. 이미 들었던 이야기도 처음 듣는 것처럼 한다. 그러면 어머니는 더욱 목소리를 높인다. 나는 어머니의 시퍼런 사연보다, 어머니가 돋우는 목청에서 안도감을 느낀다. 아직은 어머니에게 에너지가 있음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어머니는 수시로 TV 리모컨을 눌러 보았다.  

미스터트롯 갈무리

내가 소주병을 거의 다 비워갈 즈음 어머니가 누른 리모컨에서 화들짝 TV가 켜졌다. 어머니는 금세 화색이 돌아왔고, 전광석화처럼 어떤 채널 하나를 고정시켰다. TV조선의 ‘미스터트롯’ 이었다.

나는 TV를 거의 안 보며 지내는 생활이라 김성주 아나운서를 제외하고는 이곳 출연 가수들은 잘 모르는 편이다. 종종 유투브나 기사를 통해 접하는 정도였다. 다만 김호중에 대해서는 우리 편집장을 비롯해 주변 지인들이 하도 이야기를 해서 어떤 가수인지 조금은 알고 있었다. 아마 그들은 김호중의 열렬한 팬인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어머니에게 아는 체를 해주자 어머니는 흥이 나신지 가수가 출연할 때마다 그의 가정사조차 들려주었다. 쟤는 눈물이 많고, 쟤는 얼마나 어렵게 살았고, 쟤는 오랫동안 무명이었고, 귀염둥이 막내 동원이는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가 음향기를 설치해주며 키웠는데 돌아가셨다는 둥 하며, 쟤들이 있어서 함께 울고 웃는다고 하였다. 김성주 아나운서도 눈물쟁이라고 하였다. 이제는 연세가 있어 이곳저곳 몸이 불편한 어머니가 그처럼 생기 있게 말씀하는 걸 언제 보았을까 싶었다. 덩달아 내 기분도 취기처럼 올랐다. 


‘미스터트롯’ 이 그간 시골에서 홀로 지내는 내 어머니에게 얼마나 기쁨과 감동의 눈물을 주었는지 새삼 깨닫게 되면서, 그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불쑥 솟았다. 저들이 효자였다. 자식이 하지 못한 부분을 해주고 있었다. 어머니 말씀을 듣고 보니 출연 가수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미 유명세를 타고 있지만, 기성 가수들에게는 보지 못하던 순수와 풋풋함이 느껴졌다. 서민적이고 정이 깊어들 보였다. 사실 나는 조선일보와는 좀 뚱한 사이다. 특히 정치적 부분에서 그러하다 보니, TV조선에도 별로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진영을 떠나 ‘미스터트롯’ 이 어머니처럼 시골에서 홀로 지내는 어른들에게 얼마만큼 정서적 안정을 가져다주는지 어머니를 통해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작년 2월 코로나 19가 발광할 무렵부터, 자식들에게 매일 전화를 두세 번씩 하였다. 자식이 매일 안부 전화를 하던 것이 바뀐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TV만 켜면 어디에서 몇 명의 확진자가 나왔다는 뉴스뿐이었다. 행여 자식들이 어찌 될까 봐 좌불안석이었다. 절대 어디 나다니지 말라며 신신당부였다. 직장에서 하는 식사도 사무실에서 해 먹던지 도시락을 싸서 다니라고 하였다. 90세 가까운 어머니가 혼자 계시니 자주 내려가 봐야 하는데도, 내려가겠다 하면 자겁 질색을 하며 손사레를 쳤다. 그러던 어머니에게 언제부턴가 내가 다시 전화를 걸기 시작한 것이다. 어머니 스스로 ‘미스터트롯’을 알게 되면서 코로나19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미스터트롯’을 시청하기 시작하면서 자식들에게 전화하는 걸 줄인 셈이다. 아무래도 뉴스 시청보다 ‘미스터트롯’ 시청 시간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함께 본 ‘미스터트롯’에는 김호중이 안 보였다. 정동원, 영탁, 이찬원, 임영웅, 장민호, 김희재 등이 출연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김호중 이름이 생각이 안 나, 어머니에게 좀 덩치 크고 성악을 전공한 가수는 안 나오느냐 하였더니 “아, 김호중” 하는 것이다. 어머니는 김호중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 방을 나와 핸드폰을 열어 보니, 메시지 하나가 와 있었다.

‘별량면 외 일대 일시적인 정전이 있었습니다. 불편드려 죄송합니다. -한전순천지사’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니들 진짜 정전시키지 마라. 어른들 미스터트롯 못 보면 고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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