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나눔(우수도서) 선정도서 민혜 ‘어머니의 불’중에서
1962년 4월 25일
아침부터 보슬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한다. 날이 흐린 탓인지 밥이 늦어 당황하였다. 밥이 끓지 않아 종이도 때고 하여 그럭저럭 늦지는 않은 모양이다. 조바심이 많은 숙이 서서히 준비하는 걸 보면 시간이 충분한 것 같다. 나는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제대로 먹이지도 못하는 어미로서 가슴 아픈 일이 많은데 조반도 못 먹여 보내면 어쩌나 하고 절절매었다.
애들을 다 보내고 난 뒤 밥상은 그대로 놔두고 눈을 감고 누워 라디오에서 나오는 희망 곡을 들었다. 아무아무가 아무아무에게 선물로 보내는 곡이라고 아나운서가 앵무새 같은 아름다운 소리로 말하는데 음악이 흡사 나를 위해 들려주는 것처럼 상쾌했다. 드디어 음악이 끝났다. 그제야 밥상을 치우고 또다시 누워 침묵에 잠긴 나는 지나간 불행과 현실에서 당한 불행을 생각하고 있다. 막을 수 없는 나의 불행을 하나하나 분석해본다. 깊이 들어갈수록 나는 비참해진다. 나의 비운을 피해보려고 노력도 해봤다. 그렇지만 그것도 한순간이고 이제는 세상이 귀찮아지기만 한다. 나뿐만이 아니고 진도 가정환경을 비관한다. 비관하는 진이 가엽다. 그러나 모성의 힘으로도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일이다. 오늘은 하루 종일 자살에 대하여 신경 썼다. 고생이 되면 갈 길은 그것뿐이다.
1962년 4월 27일
이 날 일기는 원본의 분위기를 그대로 전하고자 도입부 일부를 어머니가 쓰신 대로 옮겨보았다.
짓구진 봄비는 긋치지 안코 줄줄 나린다. 악가운 벚꼿 살구꼿이 다 진다. 짓구진 비바람아 좀 삼가주렴. 무엇이든지 사람한테 버림밧는 건 난 시러. 꼿도 지면 버림밧겟지. 악까워라.
옛노래 멜로디가 들려온다. 20년 전 노래가 나와서 나는 처녀시절을 상상해본다. 과연 짤밧던 추억이로구나 시퍼 일을 시작하엿다. 오늘은 고추를 다듬어서 빳기로 하고 쪽마루에 안자서 고추를 하나하나 가위로 자르며 내게 닥쳐올 비운을 하나하나 상상해보며 비장한 결심을 한다. 내가 돈을 벌어서 살다가 돈 떠러지고 못살게 되면 긋때는 갈 길이라고 자살바께 업다. 그러나 자살을 할 때는 애들과 상의하여 찬성하면 약을 갓치 먹는 게 오른가 또는 내가 비밀로 먹이는 게 조흘까가 의문이다. (중략)
허둥지둥 저녁 준비를 하고 잇슬 때 남편이 터벅거리고 드러온다. 오자마자 밥 재촉을 한다. 쌀이 떠러져 국수를 해가지고 드러오니 밥 안하고 국수 햇다고 꾸지람을 한다. (중략)
또 행패를 부리기 시작한다. 꼭 밋친 사람과 다름업다. 이혼하자고 옷 내노라고 내 얼굴을 치면서 욕을 한다. 내 얼굴에서 불근 피가 나온다. 나는 피를 손에 찍어 가지고 남편의 옷에다 문지렀다.
살 길이 막연한 나는 숙, 열을 붙들고 갓치 죽자고 울엇더니 숙은 엄마 죽지마. 천주님한테 죄가 돼. 내가 공부 열심히 학게 하며 애처럽게 울부짓는다. 진정하고 보니 시간은 자정이다.
이 처절한 장면이 나는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지워진 게 고맙지. 만약 그 기억이 남아 있었더라면 머릿속이 얼마나 칙칙했을까. 아버지와 엄마가 자주 다투신 건 알지만 아버지가 엄마에게 손찌검을 한 걸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나는 엄마에겐 매를 맞았어도 아버지께 맞은 적은 드물다. 이런 아버지가 엄마에게 손찌검을 하셨다니 일기를 읽어나가면서도 좀체 믿어지질 않았다.
1962년 5월 3일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이사 가려고 만반의 준비가 되었건만 비가 내린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하여 이삿짐을 나르기 시작한다. 땀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남편이 안 온다고 하더니 와서 힘껏 일한다. 궂은비를 맞아가며. 마음속으로 고마웠다. 나는 이웃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차 운전석 옆에 올랐다. 이웃사람들이 나와서 전송해준다. 외국이라도 가는 것처럼 마음이 쓸쓸해지고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참으려 하니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운전수는 차를 몰아 남산을 한 바퀴 돌더니 큰길로 빠진다. 정들었던 이 거리도 잘 있거라, 모든 사람들 잘 있거라, 하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천 가지 만 가지 공상 끝에 차는 어느덧 미아리 고개를 넘어 목적지인 정릉이 보인다. 이윽고 목적지인 집이 보이며 트럭 한 대가 내려온다. 사람들이 많이 나와 전송하는 걸 보니 이사 가는 차 같기도 하다. 언니와 준성 어머니가 먼저 와서 집 청소를 깨끗하게 해 놓았다. 동네 사람들이 짐을 날라준다. 고맙고 또 고마웠다. 빈촌이란 인심이 후한 모양이다. 나는 늘 부촌에만 살아봤기 때문에 이런 친절에 감탄한다.
유년기부터 우리가 살던 곳은 서울의 중구 지역이었다. 충무로와 필동과 남산동, 이 세 지역을 벗어나지 않고 살아왔다. 한데 이제 유배 가듯 변두리 동네로 이사를 간다.
2021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3차 문학나눔(우수도서) 선정…민혜 ‘어머니의 불’
https://youtu.be/9BE-lx8Tvg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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