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 읽으면 더욱 아픈 엄마의 일기 3

by 해드림 hd books

2021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나눔(우수도서) 선정도서 민혜 ‘어머니의 불’중에서


1962년 5월 13일(주일)

안방 창문을 열면 누구의 묘인지 둥그렇게 생긴 묘가 편안히 누워있는 게 보인다. 묻힌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은 못하여도 보기에 퍽 편안해 보인다. 조석으로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나는 흙에 묻힌 고인을 부러워한다. 나는 그를 부럽게 바라보며 저 세상을 상상해보기도 한다. 말이 없는 그 고인은 나의 벗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파란이 많은 나는 무엇이든지 호수처럼 잔잔하고 평온해 보이는 것을 다 벗이라고 한다. 말이 없는 그 묘지는 계절 따라 옷을 바꿔 입는다. 여름에는 녹색으로 겨울에는 흰색으로. 이렇게 변하는 것을 고인은 알 수 있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해본다.


정릉의 산동네는 가옥들과 묘지들이 이웃해 있었다. 처음 그곳으로 이사 갔을 땐 인가 옆에 묘지가 있는 걸 보고 기겁했었다. 하지만 엄마는 그 무덤을 보면서 무덤 속의 고인을 부러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죽음에 대한 동경이 그림자처럼 엄마의 곁을 따라다니고 있다.

1020296.jpg 어머니의 불

1962년 5월 14일

평온한 날씨다. 며칠 동안 바람이 불어 정신을 어지럽게 하더니 오늘은 잔잔한 물결처럼 좋은 날이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은 언제나 쓸쓸해 보인다. 안방 건너 방을 왔다 갔다 하는데 대문에서 노크 소리와 함께 “계십니까?” 하기에 나가보니 김○○였다. 나를 찾아주니 고맙고 감사했다.


숙이가 아침도 안 먹고 학교 가더니 배고파 들어오는 모습이 흡사 마네킹이 이동하며 걸어오는 것 같다. 뒤이어 진과 열이 다 온다. 네 식구가 모이면 집안이 허전함을 면한다. 오늘은 시험이 끝나는 날이라고 숨을 내쉰다. 잘 먹지 못하고 밤공부에 열중한 진, 숙의 얼굴은 핼쑥하게 살이 빠졌다. 보기에도 너무 가엾어서 못 볼 지경이다. 그러나 닥쳐올 앞날을 생각하면 캄캄하다. 이미 각오한 바와 같이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은 변함이 없다.


멀리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 처량도 하다. 깜박거리는 등불 밑에서 고요히 앉아 새근새근 잠자는 애들을 쳐다보며 얄궂은 내 비운을 한탄해본다. 계집에 미쳐서 자식도 모르는 허수아비 같은 남편을 원망도 해보고 아버지 자격을 손실하고 위신을 잃은 남편을 동정도 해본다. 그러나 아무런 대책은 서지 않는다. 깜박거리는 등불을 멍하니 쳐다보며 흘러간 37년이란 긴 세월을 더듬으며 눈물도 흘려본다. 허무한 인간 사회. 불결한 남녀관계. 모두 허무한 것뿐이다.

먹이고 입히고 가르쳐야 할 새끼 세 명을 거느린 서른일곱 살의 여인. 남편은 장사도 망해 먹고 빚만 남겨놓고 딴 여자와 살림 난 지 오래다.

김○○는 과거 그의 고학생 시절에 엄마가 도움을 주었던 청년으로 당시 대학생이었다. 그는 한동안 엄마를 자기 삶의 은인이라면서 가끔씩 우리 집을 찾아왔지만 점차 발길을 끊었다. 그는 남의 집 담배를 팔아주며 고학을 했기에 우린 그를 ‘담배학생’이라고 불렀다.

1166140.jpg 어머니의 불

1962년 5월 15일

나뭇잎이 나날이 파랗게 우거져 빨갛던 산을 파랗게 물들였다. 그 사이로 보이는 다닥다닥한 판잣집들이 벌집처럼 촘촘히 붙어있다. 그러나 그 속에 사는 사람은 모두 평온해 보인다. 그것이 행복한 사람이다. 행복이란 돈으로만 이룰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방바닥에 누워 이것저것 공상만 한다. 닷새가 되도록 남편 얼굴을 못 봤다. 오늘이나 찾아올까. 내일이나 찾아올까.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하루면 마음이 몇 번씩 변해져 가는 나는 몸 둘 데 없이 외롭다.


임■■라는 여자는 짐승 같은 여자다. 첩으로 내 남편을 저 혼자만 독차지 하려고 기를 쓰는 여자. 인정사정없이 염치도 위신도 없이 그저 저만 좋으면 그만으로 알고 사는 여자다. 소행은 한없이 미우나 가엽기도 하다. 돈을 가지고 남자를 매수하고 조롱하는 그녀는 나의 가슴에 못을 박았으니 그만큼 피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악독하고 또 악독한 그녀는 돈으로 남의 가슴에 못을 박고 남의 가정을 파괴하였으니 그녀의 그 더러운 돈 속에는 피눈물이 젖어들 것이다.

비바람이 요란하다. 어둔 밤에 비바람이 요란하니 무서운 생각이 든다. 십자고상에 조용히 친구(親口)를 하고 무서워 떠는 저를 도우소서 애원하며 잠들기를 간절히 청한다. 고독에 떨고 있는 한 인간을 굽어 살피소서, 아베 마리아여.


엄마는 아버지의 첩 임■■에게 원망과 악담을 퍼부으면서도 잠깐 동정을 하기도 한다. 왜 그랬을까? 소행은 한 없이 밉다면서도 가엽다고 한 것은 무슨 심리인가?

악담 가운데 뱉는 엄마의 한 마디가 나는 다행스럽고 고맙게 느껴졌다. 세월의 힘일 것이다. 세월은 사랑이나 미움도 동시에 품고 가뭇없이 흘러가므로.

15303752.jpg 어머니의 불

1962년 5월 16일

어느덧 5·16 군사혁명 1주년 기념일. 빠른 것은 세월인가. 나에게도 휴일이다. 애들이 놀기에 나도 부지런히 치우고 언니네 가려고 외출복을 갈아입고 언니네로 갔다. 언니는 언제나 꾸물대기로 유명한 분이다. 오늘도 여전히 세수도 안 하고 그대로 계시다. 나는 슬그머니 속이 상했다. 어제 약속을 했으면 좀 일찍 서두르면 얼마나 좋을까.

자리에 좀 누워 있는데 애들이 집에 아버지가 왔다고 부르러 왔다. 점심을 간단히 먹고 집에 오니 남편이 누워 있었다. 왜 오라고 했느냐 묻자 점심이 먹고 싶어 오라고 했다고 한다. 별 일도 없으면서 내가 없으면 좀 섭섭한 모양이다. 욕심꾸러기. 집에 와서 자지도 않으면서 나만 없으면 찾으니 혼자 웃음이 나온다. 무언지 몰라도 그래도 나한테 무슨 호의를 베풀려고 하는 모양이다. 옛날 얘기도 하고 술도 달라고 한다. 나는 하라는 대로 순순히 잘해주었다.


해가 석양이 기우니 또 간다며 “나, 가.” 하고는 사라진다. 멍하니 쳐다보며 한숨만 쉰다. 그러나 만사는 천주께 맡기고 울며 웃고 살아가기를 맹세하며 예수 마리아 굽어 살피소서라고 부르짖는다. 외로우면 부르짖고 급하면 부르짖는다. 십오야 밝은 달을 바라보며 마당에서 산책도 해본다. 외롭게 떠 있는 달이 내 마음을 밝게 비쳐 마음이 흐뭇하다. 혼자 보기에 아깝다. 무언가를 달과 속삭여 보았으면 싶어 달만 쳐다보고 있으려니 멀리서 트럼펫 소리가 은은히 들려온다. 외로이 달빛 아래서 묵주를 손에 걸고 성모님께 구원을 빈다. 안녕,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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