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석가탄신일이 어버이날, 엄마의 일기6

올해는 석가탄신일이 어버이날, 어버이날 읽으면 더욱 아픈 엄마의 일기 6

by 해드림 hd books

2021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나눔(우수도서) 선정도서 민혜 ‘어머니의 불’중에서

1962년 5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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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동에 가서 기류계를 해가지고 집에 오니 애들이 집을 정신없이 늘어놓았다. 여기저기 치우고 몸이 나른하여 좀 누웠다 마루에 앉아 있으려는데 대문이 열리며 남편이 들어온다. 반갑다. 100원짜리 드로프스(사탕) 한 봉지를 내놓으며 먹자고 한다. 웬 돈이 있어 샀느냐 하자 시계를 전당포에 잡히고 용돈을 쓴다고 한다. 속으로 가여웠다. 그러나 자기의 잘못으로 그런 거니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는 돈 많은 첩이라고는 하나 첩이란 돈을 뜯으려 하지 자기 것을 남편에게 줄 리는 만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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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엔 전당포가 흔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돈이 필요하면 금반지나 손목시계, 하다못해 전기다리미까지 들고 가서 푼돈을 빌려 쓰곤 했다. 근데, 기류계가 뭐지? 엄마 일기엔 지금은 쓰이지 않는 단어들이 이따금 나온다. 기류계도 그중의 하나다. 갸우뚱하려는데 아, 생각난다. 박완서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도 기류계란 단어가 나온다. ‘엄마가 벌써 지금의 주민등록에 해당하는 기류계를 사직동에 사는 친척 집에 옮겨 놓은 후였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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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5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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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려도 소식이 없는 종암동 건은 오늘도 이렇다 할 소식이 없다. 또 교통비를 꾸어 그곳으로 달려갔다. 오늘은 김성태를 정면으로 만났다. 나는 그를 붙들고 통사정을 하였다. 그 돈이 우리 식구의 목숨이라고 하였더니 6월 2일엔 꼭 준다고 하기에 그냥 돌아왔다.

남편이 들어온다. 이삼일에 한 번씩 오는 남편이지만 무척 반갑다. 부부의 정이란 더럽다더니 과연 더러운 게 정인가보다. 점심을 차려서 방으로 들여갔더니 맛있게 먹는다. 속으로 반가우면서도 어찌하면 집으로 끌어올 수 있을까를 머리가 아프도록 연구, 연구. 그러나 지금 서두르는 게 좋은지 좀 더 두어야 좋은지가 의문이다. 요즘은 집도 보살펴주려고 한다. 내가 요즘은 좀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요사한 게 여자의 마음이라 남편이 좋아하는 걸 해놨으면 싶지만 돈이 없고 보니 어쩔 수 없는 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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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6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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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아프도록 하늘을 바라보며 기다리던 비가 드디어 내리기 시작했다.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다.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조차 음악인 듯 사뭇 마음이 흥겹다. 바빠서 못 온다고 말하고 간 남편이 내일은 오겠지 하고 기다린다. 이것이 내 운명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한 남자에게 받쳤던 나의 애정은 변할 리 없고 이룰 수 없는 순정이다. 행동은 미워도 사람만은 밉지 않은 게 나의 남편이다. 오후나 돼야 들어오는 남편이기에 오후가 되기를 기다리며 시간을 재촉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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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작컨대 나의 부모님은 한 시절 정이 두터웠던 것 같다. 그럴 때의 아버지가 엄마를 어떻게 대하셨을지 짐작이 가기도 한다. 아버지는 미남이셨으니 엄마가 좋아했을 만도 하다. 진심인지는 몰라도 엄마는 한사코 아버지를 미남이라 인정하지 않았지만.

집 나간 남편은 이런 아내를 가끔씩만 찾아와 끊어질 듯한 부부의 연을 아슬아슬 이어나갔다. 앞서 읽은 일기에는 아버지가 나흘들이로 오셨던 모양인데, 여기선 이삼일로 간격이 좁혀 들었다. 아버진 그 무렵 임■■와의 애정 전선이 금이 가기 시작한 걸까. 뭐니 뭐니 해도 자식새끼와 조강지처가 있는 집이 제일이라는 자각이 들기 시작한 걸까.

엄마는 아버지에게 지성이었다. 밥상을 차릴 때면 비록 없는 살림이라도 반찬 하나하나에 정성을 다했다. 엄마의 신앙적 대상 으뜸이 하느님이라면 둘째는 남편과 아들이었는지 모른다. 남존여비 사상이 지배하던 시절에 태어나 지아비를 하늘처럼 떠받는 걸 미덕으로 알아 그랬는지 아니면 우리 형제가 몰랐던 아버지에 대한 속정이 깊었던 건지는 알 수 없다. 그러니 그야말로 애중 속에서 아버지를 기다리고 애태우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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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9BE-lx8Tvg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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