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석가탄신일이 어버이날, 엄마의 일기 5

올해는 석가탄신일이 어버이날, 어버이날 읽으면 더욱 아픈 엄마의 일기 5

by 해드림 hd books

2021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나눔(우수도서) 선정도서 민혜 ‘어머니의 불’중에서


1962년 5월 19일


3일에 한 번씩 나타나는 남편이 올 시간이 되어 신경이 온통 대문 소리에만 가 있다. 해는 오늘도 기울어 간다. 저녁 준비를 하려고 부엌에 들어가 깨를 볶고 있는데 남편이 들어오며 씩 웃는다. 나도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모든 일이 뜻대로 안 되니 화만 난다고 하며 돈 3,000원만 있으면 달라기에 1,000원밖에 없다고 하니 그거라도 달라하여 털어 주었다. 나가면서 내일 또 올게 하며 돈을 벌면 반반씩 나누자고 자신 있게 말한다. 임■■가 20만 원 꿔주었다며 기특한 듯이 말한다. 나도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하며 모쪼록 잘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중략)


임■■란 여성은 카바레 댄서 일을 하다가 아버지와 만난 것으로 안다. 엄마에게 듣기론 춤 실력과 애교가 뛰어나다고 했다. 내가 6학년 때인가, 그러니까 남산동 시절, 한번은 그녀가 엄마에게 잡혀 우리 집까지 끌려 들어온 적이 있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우리 집과 불과 얼마 안 되는 거리에 방을 얻어 놓고 살림을 차렸다가 발각된 상황이라 엄마는 그야말로 눈이 뒤집혀버렸다. 독이 머리끝까지 오른 엄마는 우리들이 보는 데도 그녀의 머리채를 사납게 휘어잡고 몸부림을 쳤다. 그녀가 나쁘다고 여기면서도 나는 한편으론 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만약 엄마에게 대들고 사납게 굴었다면 내 마음도 달랐을 터나 두려움 때문인지 자기 죄를 알기 때문인지 그녀는 고양이 앞의 쥐 마냥 꼼짝하지 못했다.

그녀는 키가 작고 말라깽이에 얼굴이 예쁘지도 않았다. 아니 예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빈상에 정이 가는 구석이라곤 없어 보였다. 그녀를 보며 저 못 생긴 여자에게 우리 아버지 같은 미남자가 어째서 빠져들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을 정도로.

아버지는 정이 많고 인물이 좋았으니 여성들이 좋아했을 만하다. 언제부터 두 사람의 관계가 시작됐는지는 몰라도 돈 떨어진 백수 아버지에게 돈을 빌려주기도 한 걸 보면 그녀 역시 아버지를 깊이 좋아했는가 보다.


1962년 5월 24일


기다리고 기다리던 비는 새벽에 몇 방을 쏟아지더니 날이 활짝개이고 말았다. 사람들은 하늘만 쳐다보고 쓴 입맛만 다실뿐이다. 비는 인력으론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절기 잡초가 우거지고 아카시아 향긋한 꽃향기가 드높다. 나는 애들이 꺾어다 준 아카시아 꽃 한 송이를 들고 향기만 한없이 들이마셨다. 30년 전, 내가 어렸을 적에는 많이 따먹기도 하던 꽃이다.

내가 임■■를 만나서 하고 싶은 말을 동정적으로 해결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니 밤이면 잠이 안 온다. 빨리 만났으면 한다. 그녀는 나에게 어떠한 태도를 보일 것인지 눈을 감고 상상해본다. 내가 동정적으로 눈물이 나오도록 타이르면 들어줄까. 간곡한 청을 하면 저도 목석이 아니면 눈물을 흘리겠지. 그러면 나도 눈물로 보답해야지, 이런 상상이 날로 심해간다. 아무튼 한 번이라도 만나보면 속이 시원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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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5월 28일(주일)


나도 모를 정도로 내 마음이 흔들려 갈피를 못 잡겠다. 시시각각으로 마음이 변하고 흥분하고 당황하는 게 괴롭다. 하늘이라도 치받고 싶고 땅이라도 수십 길 파고 싶은 생각이다. 진정하려 해도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오늘은 꼭 서교동(임■■의 집)엘 가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며 숙과 성당에 갔다. 두서없는 내 신공(기도)을 천주님께서 들어주실지 근심을 하며 진정으로 내 소원을 들어주시기를 기원했다. (중략)

언니네로 갔더니 요섭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같이 시내 나가서 언니가 갈비탕을 사주어 맛있게 먹었으나 집에 있는 삼 남매가 걸려서 고기를 먹으면서도 가시를 먹는 것 같았다. 언니가 극장 구경도 시켜준다기에 나는 쫓아만 다녔다. 영화는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여’였다. 소월의 시다. 참 감동 깊었다. 삼류극장*으로 오면 진에게도 꼭 보여주어야지.

집으로 오면서 도나쓰(도넛)를 조금 사 가지고 왔다. 와 보니 애들은 밥하기 싫다고 쉰밥을 먹으려 한다. 너무도 미안해 밥을 다시 해서 먹였다.


세 등급의 영화관이 있었다. 개봉관, 재개봉관, 그리고 삼류극장. 삼류극장은 관람료가 싼 대신 영상은 엉망이다. 번번이 끊기는 필름, 비가 오는 듯 세로줄이 그어지는 화면. 그럼에도 영화를 두 편이나 볼 수 있는 매력 있는 영화관이었다. 삼류극장은 하류인생들만 가는 곳은 아니었다. 학생들도 드나들고 나 또한 눈치껏 삼류극장에 출입하며 비비안 리의 <애수>도 보고 그랬으니까.

삼류극장에 가면 성추행하는 남자들의 손길을 조심해야 한다. 영화를 보는 척 고개는 스크린을 향해 있으면서도 손으론 은근슬쩍 옆자리 여성의 허벅지를 만지거나 하는 족속들. 그들은 영화관의 어둠이 주는 장막 때문인지 아무리 눈치를 주고 불쾌감을 표현해도 매우 집요했다. 나는 어느 날 견디다 못해 우산 꼭지(그날 비가 왔던가 보다)로 추행범의 발등을 구멍이라도 낼 듯 세게 찍어 버렸는데, 그제야 일어나 슬그머니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여하간 곳곳에 이런 극장이 있었던 덕에 지갑 얇은 서민들이나 각다분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문화 욕구가 채워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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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9BE-lx8Tvg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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