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석가탄신일이 어버이날, 어버이날의 엄마의 일기7

올해는 석가탄신일이 어버이날, 어버이날 읽으면 더욱 아픈 엄마의 일기 7

by 해드림 hd books

1962년 6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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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흐뭇하게 내리는 비, 그칠까 두려워 하늘을 쳐다보곤 한다. 맑게 흐르는 낙숫물을 그릇 그릇 받아놓고 더 이상 빈 그릇이 없으니 입안에라도 물고 있고 싶은 심정이다. 옷가지를 이것저것 빨기도 한다. 제철 만난 개구리도 개굴개굴, 맹꽁이도 맹꽁맹꽁, 암놈 수놈 정답게 장단 맞춰 힘차게 운다. 그러고 보니 정릉이란 곳은 산간벽지 같기도 하다.

나에게 상처를 준 임■■란 여자가 언젠가는 나에게 지은 죄를 고백하리라는 예감이 때때로 가슴을 찌른다. 그리고 자꾸만 들어오는 것 같다. 나의 모든 억울하고 억울한 심정을 천주님께 기회 주시기를 끝없이 빌어본다. 그러나 좀체 오지 않는 안타까운 마음을 벗에게만 전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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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 고생이 얼마나 심했으면 비 그칠까 두렵다고 했을까. 낙숫물을 입안에라도 물고 있고 싶다고 한 이 묘사는 정말 절창이다. 애옥살이도 모자라 물 기근까지 겪어야 했던 엄마 심정에 나는 또 울컥하면서도 한편으론 빗물로 무지 행복했을 걸 헤아리며 같은 기분에 젖을 수 있었다.

엄마는 표현력이 좋은 편인 데다가 과장법도 능해서 일상의 대화도 재미있게 하는 편이었다. 때문에 간단히 얘기할 것도 길어지곤 했다. 흥이 나면 엄마는 온몸으로 제스처를 써가며 실감을 더해주었다. 물론 화가 나서 욕을 할 때도 엄마의 이 천부적 실력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아마 내연녀인 임■■를 품고 사는 아버지와 부부 싸움을 할 때도 엄마는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는 아버지를 향해 타고난 입담으로 박박 긁어놓았을 것 같다. 아버지가 엄마에게 손찌검을 했던 것도 이런 상황이 아니었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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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6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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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맞아가며 쪼그마한 꽃밭에 화초를 심어 놓고 그것을 들여다본다. 오후가 돼서야 삐꺽 대문 소리와 함께 남편이 들어온다. 반갑다. 꽃밭을 만져주기도 하는 남편이 어쩐지 이상해. 어딘지 모르게 부드러워. 돌아오면 안 나갈 것 같고, 나가면 안 돌아 올 것 같아. 요즘은 때때로 점심이라도 먹어주니 고마운 일이지 뭐유.

앞 냇가에는 냇물이 쏴~하고 힘차게 흘러간다. 나의 모든 괴로움 모두 물에 띄어버리고 싶은 심정. 그러나 이제는 눈물도 말라붙은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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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밭을 다 만져주셨다니. 아버지 심경에 뭔가 변화가 있는 게 틀림없나 보다. 하기야 아버지도 화초를 좋아하셨다. 초등학교 시절의 어느 겨울인가 시크라멘 화분을 사들고 온 적이 있었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는 좋아한 것도 참 많은 분이다. 열정 많고 다감했던 분이었기 때문이리라. 내가 기억나는 아버지 취미만 해도 카메라로 사진 찍기, 마작(이건 도박이기에 취미라고 말하긴 좀 그렇다만), 동물 키우기, 낚시, 댄스…. 아버지가 젊었을 적엔 닭싸움 구경을 좋아해서 아버지네 닭과 이웃집 닭과 싸움판을 벌리기도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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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6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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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떨어지고 보니 얼굴에 초조감이 더욱 심하고 기미만 늘어가서 따분하다. 종암동에 길이 나도록 쫓아다니며 돈 좀 주세요, 좀 살려주세요, 하고 눈물 흘리며 사정하는 판이다. 나도 겪어봤지만 돈 받으러 갈 때는 머리 숙이고 통사정을 해야 돈이 나온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오늘 오후 3시에 꼭 수표를 가지고 언니네로 온다기에 언니네서 만나기로 하고 약속했기에 기다리고 있는데 남편이 들어온다. 남편에게 집 좀 보라하고 재빨리 갔더니 아직 안 왔다. 좀 기다리고 있으니 김성태 씨가 들어온다. 반가웠다. 그러나 생각 외로 5만 원 짜리 연수표였다. 기가 막혀 멍하니 있으려니 그분이 미안해 어쩔 줄을 모르고 이것저것 사정한다. 할 수 없이 수표를 받아 들고 집으로 왔다. 남편도 낙심하며 돈 받으려면 고생깨나 하겠다며 나를 원망한다. 그러나 돈 문제는 사람만을 나무랄 수도 없는 일이다. 벗이여 굿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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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기미. 정말 싫었다. 남 보기에도 창피했다. 기미는 삶의 궁기와 비루함을 자진 신고하는 낙인 같았다. 기미는 악착스러워 화장품으로 칠갑해도 소용없었다. 옛날엔 기미 낀 여인들이 흔해 선가 기미 없애는 화장품 광고도 많았고 엄마도 이런 제품들을 구해 발랐다. 별 효과는 없었다. 뚜껑에 비너스 얼굴이 있는 어떤 크림을 꾸준히 바르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일기 사연을 보니 엄마는 김성태라는 사람에게 받을 돈이 있었는가 보다. 나는 그 내막을 정확히 모르나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엄마는 돈벌이를 궁리했을 테고 그런 와중에 얽힌 문제 같다. 수표를 써보지 않은 게 벌써 몇 년인가. 내가 사용해본 수표라곤 보증 수표밖에 없는데 연수표는 또 뭔가? 사전을 찾아보니 연수표(延手票)란 실제의 발행일보다 뒷날을 발행일로 정하는 수표라고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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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9BE-lx8Tvg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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