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1월 4일
아침은 밝아왔으나 쌀 한 톨이 없다. 조금씩이나마 죽으로라도 연명했는데 이래 보기는 처음이다. 숙과 열이에게 이모네 가서 얻어먹으라고 보내고, 우리 부부는 앞으로 살아갈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막막하다. 나는 남편더러 어디 취직이라도 해보라고 했다. 남편은 그러마고 친구들을 찾아 나섰다. 아침도 굶고 점심도 굶으니 천지가 뒤집히는 것 같다. 할 수 없이 언니에게 돈을 꾸기로 하고 몇 자 적어 진에게 심부름을 시켰더니 300원을 꾸어왔다.
1963년 1월 12일
친구에게 부탁한 취직이 거절되어 남편은 매우 실망적이다. 자살이라도 하고 싶단다. 무섭고 비참했다. 나 자신이 몇 번이나 자살을 기도했으나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늘 밤늦게 돌아온 남편이 이상하게도 기분 좋은 얼굴이다. 어리벙벙한 나는 뭐가 그리 좋으냐고 물었다. 남편은, 누가 명동에 가게를 싸게 얻어준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반갑지가 않았다. 가게만 있으면 뭘 하나. 돈이 있어야지.
날씨는 사정없이 춥기만 하다. 영하 19도를 오르내리는데 우리는 연탄도 한 장 두 장 사다가 그저 냉기만 모면하고 옹기종기 새우잠을 잔다.
1963년 2월 어느 날
화장품 장사, 빠다(버터) 장사를 하다 보니 낙인이라도 찍힌 것처럼 기가 죽는다. 그러나 저녁거리가 없으니 빠다라도 몇 개 팔아야 국수 값을 번다. 애들 교통비가 떨어지면 밤이라도 가리지 않고 물건을 팔러 나가야 한다. 이젠 모든 용기도 말라간다. 길을 가다 버스가 보이면 그 바퀴 속으로 뛰어들고 싶다. 거리에 나가면 먹는 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굶주리는 세 아이들 가여워서.
1963년 2월 9일
남편이 번 돈이라며 800원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고맙다고 수없이 중얼거렸다. 며칠 있다가 또 2,000원을 준다. 2년 만에 처음으로 쌀 한가마를 사고 연탄 50장을 샀다. 큰 부자가 된 것 같았다. 그래도 장사는 계속하였다. 낮에는 살림을 하고 밤에는 장사를 했다. 언니는 날보고 올빼미라고 말한다. 밤에만 돌아다닌다고.
1963년 3월 6일
밤 11시 30분이 지나도 남편이 안 돌아오더니 11시 45분에 대문 여는 소리가 들린다. 나가보니 술에 잔뜩 취해 비틀거리고 들어온다. 집구석은 이 모양 해놓고 술만 마시고 다니니 속이 뒤틀려 한마디 하자 남편은 성질을 발칵 낸다. 나는 싸움이라도 하고 싶었다. 자정이 넘었는데 남편이 갑자기 배가 아파 죽겠다고 한다. 당황하여 진, 숙, 열을 모두 깨워 이웃 재천 씨를 불러오라고 했다. 그에게 병원 의사 좀 불러달라고 했으나 의사는 오지 않는다. 이리저리 구급 전화를 해도 오지 않는다. 나는 길로 달려 나가 야경 사무실에 들어가 전화를 걸었다. 순경이 친절하게 대해주고 백차가 앵앵거리며 달려왔다. 참말로 고마웠다. 남편을 태운 백차는 한적한 아리랑 고개를 급히 달리며 무전으로 중간 연락을 본서로 한다. 이 환자는 급성 맹장 같다고. 이윽고 ‘수도의대 부속병원’이라고 쓴 네온사인 간판이 보인다. 나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이제는 살겠구나 싶었다. 백차는 병원 마당으로 바짝 들어가며 또 앵~하는 소리를 내니 안에서 졸고 있던 간호원과 인턴들이 급히 나온다. 남편은 침대에 누워 진찰을 받기 시작한다. 의사는 급성 맹장은 아니고 병명 미상이라고 한다. 기가 막힌다. 입원하기로 하고 입원실로 들어갔다. 당장 병원비 1,000원이 필요한데 단돈 100원도 없다.
날 새기를 기다려 먼동이 틀 때 병원을 나섰다. 어디에 가서 돈을 꿀 지 막연하다. 할 수 없이 언니네로 갔다. 대문간을 기웃거리며 안을 들여다보니 식모가 아침 하러 나온다. 나는 안심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들어가니 식구들은 모두 잠이 깨어 있었다. 언니가 웬일이냐 묻기에 사정 얘기와 함께 돈 1,000원만 빌려 달라 했더니 없다고 딱 잡아뗀다. 형부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쳐다보지도 않는다. 나는 눈물이 핑 돌아 아무 말 없이 나왔다.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91156344605&orderClick=LEa&K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