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산: 용의 출현’, 심리전의 승리…부산포해전

by 해드림 hd books

영화 ‘한산: 용의 출현’ 관련, 심리전의 승리…부산포해전

국정호 ㈜한화 종합연구소 책임연구원


지난 칼럼(2022.06.21.)에서 가장 상책의 용병(用兵)은 적의 계략을 공격하는 것(伐謀)이며, 그 차선은 벌교(伐交, 적의 외교관계 공격)이며, 그 다음은 벌병(伐兵)과, 공성(攻城)이라는 <손자병법>을 이야기했다. 결국 공성법은 어쩔 수 없어서 사용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많은 인명의 손실이 따른다. 그래서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적진으로 변해버린 부산포에 과감하게 기습적으로 공격을 감행한 이순신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이번 글에서는 부산포해전(1592/09/01)에 대해서 살펴본다. 영화 "한산, 용의 출현"의 개봉으로 극장가에 다시 한번 이순신 열풍이 불고 있다. 한산대첩에서 바다 싸움의 중심에 있었던 이순신이 견내량 북쪽의 와키자카를 한산도 근해로 유인하여 거의 몰살시키고(07/08), 다음날부터 서서히 동북진하여 안골포에 이르러 적의 대규모 함선단을 격파하였다(07/10). 그리고 드디어 오늘 제4차 출전으로 150척이 넘는 함선단을 이끌고 적의 심장부인 부산포에 출격을 감행한다.


한편, 한산도 바다에서 참패를 당한 일본군은 임진년 7월 중순 이후 약 1개월간 남해안 일대에서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채 침묵을 유지했다. 이는 한산대첩의 패배로 인해 본국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해전금지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당시 부산포에는 하시바의 주력부대와 본국에서 증원된 일본군 8천여 명이 함선 430여 척을 보유하고 해안 요충지를 지키고 있었다.


손자병법의 공격 우선순위로 따지면, 부산포해전은 적의 군대와 성을 공격하는 해상에서의(from the sea) 벌병과 공성인데, 이순신은 무엇을 위해서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에 기습침투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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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심장부에 함포를 발사한 부산포해전


백사 이항복의 “고 통제사 이공 유사”에는 임진년 9월 1일, 제4차 출전인 부산포해전의 내용이 없다. (유사를 쓴 시점인) 왜란이 끝나고 2년 뒤인 1600년에 8년 전 부산포해전에 참가한 장수가 없었을 리는 만무한데, 이를 누락시킨 점이 아쉽다. 여기서는 이순신의 장계, ‘부산포파왜병장’을 토대로 살펴보자.


(전략) 9월 1일, 닭이 울자 배를 띄워서 진시(아침 8시경)에 몰운대(沒雲臺)를 지날 무렵에는 동풍이 갑자기 일고 파도가 거세어 간신히 배를 저어 화준구미에 이르러 왜대선 5척을, 다대포 앞바다에 이르러 왜대선 8척, 서평포 앞바다에 이르러 왜대선 9척, 절영도(지금의 영도)에 이르러서는 왜대선 2척을 각각 만났는데, 모두 기슭을 의지하여 줄지어 머물고 있었으므로 3도의 수사가 거느린 여러 장수와 조방장 정걸(丁傑) 등이 힘을 합쳐 남김없이 깨뜨리고, 배 안에 만재한 왜의 물건과 전쟁기구도 끌어내지 못하게 하여 모두 불살랐으나, 왜인들은 우리의 위세를 바라보며 산으로 올랐기 때문에 머리를 베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위의 절영도 안팎을 모조리 수색하였으나, 적의 종적이 없었으므로 작은 배를 부산 앞바다로 급히 보내어 적선을 자세히 탐망하게 하였더니, “대개 500여 척이 선창의 동쪽 산기슭의 언덕 아래 늘어 서 있으며 선봉 왜 대선 4척이 초량목으로 마주 나오고 있다” 하므로 곧 원균 및 이억기 등과 약속하기를, “우리 군사의 위세로써 만일 지금 공격하지 않고 군사를 돌이킨다면 반드시 적이 우리를 멸시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고 말하고, 독전기를 휘두르며 진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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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예비역 해군 중령)가 경험한 바로 부산항 인근의 해상은 영도와 오륙도를 잇는 선을 기준으로 내해와 외해가 극명하게 차이가 난다. 영도와 오륙도 밖 해상은 곧바로 먼바다의 해상상태를 보이는데, 거친 바람이 불고 풍랑이 크게 일며 삼각파도가 칠 정도이고, 반면에 영도와 오륙도 안쪽은 외해와 달리 평온하고 잔잔하다. 임진왜란 시에도 부산항의 해상상태는 이와 유사하였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순신함대도 영도 밖 외해로 돌아서 접근하지 않고 지금의 영도대교 쪽으로 하여 초량, 부산항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이순신은 해상전투의 긴장감 속에서도 연합함대 장수들과의 약속을 굳세게 하였다. 이순신은 9월 1일, 왜적의 심장부가 되어버린 부산포에까지 함대를 이끌고 기동하여 적선 500여 척과 대치하여 왜적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고, 왜적들의 뇌리에 ‘조선 수군에 대한 공포심’을 심어주었다.


상상해보라. 판옥선 50여 척을 이끌고 영도를 거쳐 부산항으로 갔더니, 적선이 500척이나 넘게 우리 국토를 유린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순간 피가 거꾸로 솟고 분노케 하며 마음을 가누기 힘들겠지만, 그다음에는 아마도 중과부적의 상황인지라 적 세력의 위용에 겁에 질려서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순신은 다음과 같이 ‘약속(約束)’했다. “싸움은 (승패를)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 군사의 위세로써 만일 지금 공격하지 않고 군사를 돌이킨다면 반드시 적이 우리를 멸시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반드시 공격하여 적들을 당황케 하여 심리적으로 압박하고 적의 사기를 꺾어야 한다.” 독전기를 휘두르고 전장으로 뛰어드는 이순신을 떠올린다.


우부장 녹도만호 정운ㆍ구선 돌격장 군관 이언량ㆍ전부장 방답첨사 이순신ㆍ중위장 순천부사 권준ㆍ좌부장 낙안군수 신호 등이 먼저 곧바로 돌진하여 왜 선봉 대선 4척을 우선 깨뜨려서 불살라 버리자, 적도들이 헤엄쳐 육지로 오르므로 뒤에 있던 여러 배들은 곧 이때를 이용하여 승리한 깃발을 올리고 북을 치면서 ‘장사진(長蛇陣)’으로 돌진하였습니다.


그때, 부산성(釜山城) 동쪽 한 산에서 5리쯤 되는 언덕 밑 3개소에 진을 치고 있는 대ㆍ중ㆍ소선을 아울러서 대개 470여 척이었는데, 우리의 위세를 바라보고 두려워서 감히 나오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전선이 곧장 그 앞으로 돌진하자, 배안과 성안ㆍ산위ㆍ굴소에 있던 적들이 총통과 활을 잦고 거의 다 산으로 올라 6개 처로 나누어서 내려다보면서 철환과 화살을 빗발과 우박같이 쏘았습니다.


이순신은 부산포해전에서 길게 함선의 줄을 늘여 장사진을 형성하고 장수들과 죽음을 무릅쓰고 다투어 돌진하면서 천자·지자총통에다 장군전, 피령전, 철환 등을 일제히 발사하고, 사부들은 장전, 편전을 쏘며 종일토록 교전하여 적선 100여 척을 깨부수고 적의 기세를 크게 꺾었다. 이 와중에 안타깝게도 녹도만호 정운(鄭運)이 전사하였다.


한 기록에 따르면, “부산포해전에서 이순신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며, 가장 신임하는 부하(정운)가 적선이 집결되어 있는 중앙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그 결과 적들의 포화 공격을 받게 되었고 정운과 그를 따르던 일부 부하들이 전사하고 부상을 입었다. 이때 이순신은 그 선박과 전사한 부하의 시체를 찾아오기 위하여 대장선에서 다른 선박과 연계한 정면공격을 가하여 정운의 선박을 구하는데 성공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구식 전투방법에 의해 위험을 무릅쓴 작전이었으며, 앞의 손자병법 내용처럼 ‘벌병과 공성에 의해 인명의 피해가 있을 수밖에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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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전한 다음날(9월 2일) 또다시 돌진하여 그 소굴을 불사르고 그 배들을 모조리 깨뜨리고자 하였는데 위로 올라간 적들이 여러 곳에 널리 가득 차 있으므로 그들의 돌아갈 길을 끊는다면 곤란에 빠진 도적들의 환란이 있을 것이 염려되는바 바다와 육지에서 함께 진격하여야만 섬멸할 수 있을 것입니다[水陸俱擊 庶可盡殲, 수륙구격 서가진섬]. 더구나 풍랑이 거세어 전선이 서로 부딪쳐서 파손된 곳이 많이 있었으므로 전선을 수리하면서 군량을 넉넉히 준비하고 또 육전에서 크게 물러나오는 날을 기다려 경상 감사 등과 바다와 육지에서 함께 진격하여 남김없이 섬멸하여야 하기때문에 2일 진을 파하고 본영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순신은 수륙병진책(水陸竝進策)으로 육상에서의 호응을 기대했다. 그러나 내륙의 상황은 해상의 일방적인 승전과는 다른 양상이었다. 이 부산포해전 이전 임진년(1592) 8월에 류성룡이 경상우병사 김성일에게 보낸 (아래의) 편지에는 “이순신은 담력이 남보다 뛰어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니 그와 서로 통하여 논의하고 서로 도우라”는 내용이 보인다. 경상우병사 김성일에게 육상에서의 부산포 진격을 촉구하는 글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러나 이때 일본군은 한양에 주둔하고 있던 가토 등의 부대를 경상도 지방으로 이동 조치하면서 이와 때를 같이하여 대부분의 병력을 김해에 집결시키고 있었다. 그리하여 조선은 육지에서의 호응이 쉽지 않았고, 그래서 이순신은 합동작전을 이루지 못하는 아쉬운 마음에 ‘바다와 육지에서 함께 진격하여야만 섬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장계에 적어 올린 것이라고 판단된다.


“전라좌수공(全羅左水公,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담력이 남보다 뛰어남을 내가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현재의 무장 중에서는 그와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을 것 같으니, 해상에서의 책임은 오로지 그 사람에게 있습니다. 영공께서도 서로 통하여 논의하고 힘을 합하여 서로 도우면 유익한 점이 기필코 적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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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한경 박사가 말하는 부산포해전


호레이쇼 언더우드 박사(Dr Horace H. Underwood, 1890-1951, 한국명 원한경)는 연희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학교)를 세운 아버지 언더우드 박사(원우두)의 아들이다. 그는 1933년 <Korean Boats and Ships>라는 책을 저술했는데, 여기에서 부산포해전을 높이 평가했다.


“이순신의 옥포해전, 당포해전, 한산대첩, 부산포해전 등 4대 해전을 사상 유례가 없는 대해전이며, 특히 부산의 왜군기지를 공격한 이순신의 부산포해전은 동시대 1587년 영국의 드레이크 제독(1543~1596, 넬슨 이전의 영국 해군의 영웅)과 같은 전법으로 그(이순신)의 함대를 항내로 진입시켜 정박 중이던 500여 척의 적함과 전투를 벌였고, 전투 끝에 왜선의 반 이상을 불태우거나 격침시켰다”고 하면서 “드레이크가 스페인령의 카디즈(Cadiz) 항구를 진격해 들어간 것과 맞먹는다”고 했다.


원한경 박사가 비유한 ‘카디즈 해전’은 드레이크 개인의 복수심에서 출발하였다. 이순신과 동시대 인물인 지구 반대편 영국의 드레이크는 이 당시 노예무역에 종사했는데, 이 과정에서 스페인 해군의 공격을 받아 자신의 배를 상실하였다. 그는 이후 스페인에 대한 복수심에 대담하게도 스페인령 카디즈 항구의 도시들과 화물선을 습격해 그 재물을 약탈했다. 게다가 스페인 해군의 추적을 교묘하게 따돌림으로써 스페인 왕국에서는 제거해야 할 도적이 되었고, 스페인 사람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드레이크의 개인적인 복수심과 달리 이순신은 오로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싸웠다. 이순신은 구국일념으로 수륙병진책을 수립하여 부산의 왜군기지를 해상에서 공격할 계획을 세웠고, 50여 척의 판옥선과 130여 척의 잔여 전선으로 부산포항에 정박한 적선 500여 척을 상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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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포해전은 심리전, 벌모를 만들어 낸 이순신의 충격요법


서애 류성룡은 그의 <전수기의(戰守機宜)>에서, “대저 군사를 써서 적을 당함에는 반드시 정(正)이 있고 기(奇)가 있다. 기와 정을 순환시켜서 임기응변을 무궁하게 하는 자가 병사를 잘 부리는 훌륭한 장수이다”라고 하였다.


기와 정은 각각 ①기공법과 ②정공법이며, ①기공법은 손자병법에서 말하는 “적의 무방비한 곳을 택하여 공격하고, 적이 뜻하지 않은 곳을 노려서 공격하는 것[攻其無備 出其不意, 공기무비 출기불의]”으로 주로 기습작전의 요체이고, ②정공법은 아군의 숫자가 많고 사기가 올라 있으며 무기체계가 우수할 때 적과 정면승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간적으로, 지리적으로, 작전적으로 허점을 찾아내어 공격하면 승산이 있다는 말이다. 류성룡은 기와 정을 순환시켜서 임기응변을 무궁하게 하는 장수가 용병(用兵, 군사를 부림)을 잘하는 장수라고 말한 것이다. ‘적과 마주할 때에는 반드시 변칙술인 기(奇)와 정공법인 정(正)을 순환시켜서 임기응변을 시행하는 ‘해전의 신 이순신’이었다.


부산포해전은 임진년 최대 병력의 출동이었고, 적선 100여 척을 격파하는 최대의 전과를 올리게 된다. 이순신은 기공법과 정공법의 임기응변으로 적의 심장부를 겨냥했으며, 벌병과 공성을 통해 적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지만, 한편 정운 장군을 잃는 비운을 맞았다. 누가 생각해도 왜적의 본영이 있는 부산포에 들어간다는 것은 위험천만하면서도 부담이 가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기습적으로 적의 본진에 들어가 해상전투를 과감히 수행하여 조선 수군의 군사적 위용을 적들에게 드러내고, 적에게 공포심을 심어주었다.


이순신은 이 부산포해전을 통해 적의 심장을 순식간에 정지시켜 적을 심정지상태로 만듦으로써 적들이 상상하지 못한 기공법, “적의 무방비한 곳을 택하여 공격하고, 적이 뜻하지 않은 곳을 노려서 공격하는 것[攻其無備 出其不意, 공기무비 출기불의]”으로 적과의 심리전에서 승리했다. 가장 상책의 용병인 벌모(伐謀)가 빛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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