親BOOK 座派,
이태곤의 세상 이야기
나는 이 책의 제목을 정하는 데에 많은 망설임이 있었다. “나는 친북좌파다.” 너무 과격하지 않을까? 지나치게 선동적이지 않을까? 그러나 그 선언의 내용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책의 제목을 그렇게 정하기로 하였다. 나의 선언은 책을 좋아하고(친북親BOOK), 매일 책상 앞에 앉아서(좌파座派) 생활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낯설게 하기이다. 더 나아가서 개념에 불과한 것이 이데올로기로 작용하면 국민을 분열시킬 수 있다는 철학도 함께 담고 있다. 나의 글쓰기의 바탕에는 철학과 미학이 깔려있다. 나의 철학과 미학은 다분히 사회적이다. 문학과는 거리가 멀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새로운 도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시작을 내가 생각하는 수필의 미학으로 시작하려고 한다.
예술작품에 대한 해석은 해석자가 자신의 견해를 투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100% 객관적인 해석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비어즐리에게는 작품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을 드러내는 작업이고, 마골리스에게는 외적인 내용을 부과하는 작업이다. 나의 생각은 어쩌면 마골리스의 생각과 유사할지도 모른다. 바르트나 데리다에 있어서도 예술작품의 해석은 참이나 거짓, 혹은 타당성과 부당성의 문제가 아니라 불확정적이거나 미결정적인 것이라고 한다. 그들에게 예술작품의 해석은 미결정적인 것을 채워주는 새로운 창조에 가깝다. 바르트는 텍스트의 의미를 부여하는 권한이 저자에게 없다는 의미에서 저자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텍스트의 의미는 끝없이 생산된다고 보았다. 데리다는 텍스트에 대한 해석은 자유로운 유희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단어의 의미는 다른 단어들과의 차이에서 생기며, 이 차이는 무한하게 변화한다고 보았다. 예술작품의 해석에 유일한 하나의 해석이 없다고 보는 입장에서 예술작품의 해석에는 참과 거짓이 없고 해석자의 유희만 있을 뿐이라는 입장에 공감한다.
예술작품의 근본적인 가치는
우리의 정신 능력을 확장시키고,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
우리가 예술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작품에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작품의 평가에도 하나의 기준이 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지만, 현대 미학자들은 그러한 견해에 회의적이다. 이들은 예술 전반에 걸쳐 적용될 평가기준은 없으며, 만일 있다고 해도 그 기준은 단지 주관적이거나 사회계급이 주입한 개념의 결과물이라고 본다. 만약 예술작품 속에는 미적 속성이 있으며, 그러한 미적 속성을 밝힘으로 해서 작품이 평가되어야 한다면 이상적인 비평가의 존재도 가능하다. 이상적인 비평가는 예술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 편견 없는 자세, 미적 가치를 알아채는 정서적 감수성을 두루 갖춘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셰익스피어의 문학이 진부하다고 했다. 톨스토이는 이상적인 비평가인가? 괴테는 낭만주의 문학을 병든 문학이라고 했다. 괴테는 이상적인 비평가인가? 예술작품의 근본적인 가치는 우리의 정신 능력을 확장시키고,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에 있다고 본다. 그러한 가치 때문에 우리는 작품에 몰입할 수 있다. 우리의 정신을 몰입시킬 수 있는 작품이 훌륭한 예술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몰입도 어쩌면 우리와 취미를 같이 공유하는 사람들끼리의 몰입이기도 하다. 예술작품의 해석을 유희로 보는 태도와 유사하게, 예술작품의 평가 역시 같은 사물에 대한 취미나 감상을 공유함으로써 유대감을 높이려는 사람들끼리의 유희라고 보는 견해에 공감한다.
예술작품에 대한 비평은 해석과 평가를 함께 하는 것이다. 위에 언급한 바대로 작품의 해석과 평가가 유희에 불과하다는 입장에서는, 비평가의 비평 역시 하나의 유희일 뿐일 것이다. 멋있는 비평도 있다. 새로운 창작물로서의 비평이다. 그런 비평은 작품에 충분히 몰입하고, 작품을 진정으로 사랑할 경우에 탄생한다. 수전 손택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예술작품의 등급을 매기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다. 내게 감탄을 주지 못하는 예술작품들에 관해 글을 쓰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는 열렬한 팬이자 지지자로서 글을 쓴다.” 이런 자세가 진정한 비평가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수필 미학을 정립하고자 하는 몸부림
나의 글쓰기에는 수필이 하나의 창작물로서 예술적인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해석되기 위해서 어떠한 글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깔려있다. 이 글은 나의 수필 미학을 정립하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예술적인 글쓰기를 한마디로 정의하기 쉽지 않다. 예술이란 가족 유사성이란 용어로 정의하기도 하고, 또한 미술관에 걸린 그림만 예술작품이라고 정의 내리기도 한다. 예술은 인간이 행하는 의식적 행위이지만, 그 속에 작가의 의도, 수용자의 효과, 사물과의 관계, 가치 등 다양한 관점을 포함한다. 그 모든 것이 예술이다. 타타르키비츠는 예술이 다른 것과 구별되는 특징을 여섯 가지로 설명한다. 간단하게 옮기면 다음과 같다. 미를 산출한다. 실재를 재현한다. 형식의 창조다. 표현이다. 미적 경험을 낳는다. 충격을 낳는다. 이 중 어느 하나만 진정한 예술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나는 이런 예술을 추구한다”라고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예술은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그래서 아방가르드,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등 다양한 장르들이 등장한다. 예술적인 글쓰기에 있어서의 새로움이란 무엇일까? 특히 수필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비롯될까? 답을 찾기가 쉬운 질문은 아니다.
누군가는 글쓰기가 깃발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을 한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신문이 황색 저널리즘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글쓰기도 깃발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칼라스 사건을 재조명한 볼테르의 용기가 깃발일 수는 없다. 뒤레프스 사건에 대해 ‘나는 고발한다’를 외친 에밀 졸라가 무슨 깃발을 흔들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지식인의 사회참여일 뿐이다. 예술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것처럼, 예술로서의 글쓰기도 다양할 수 있다. 그 다양함 속에서 나는 사회참여로서의 글쓰기를 추구한다. 사회참여도 예술이다. 인간은 사회를 떠나서 살 수 없듯이, 인간이 만든 예술 작품 역시 우리의 현실을 떠날 수 없다. 타타르키비츠가 이야기하는 충격은 결국 낯설게 하기와 접목된다. 글은 새로운 충격을 안겨줄 수 있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은폐되어 있는 그 무엇을 밝히려는 시도로써의 글이 수필의 장점이기도 하다. 권력과 기득권의 횡포를 들추어내고, 전체주의로의 진행을 막고자 하는 것은 깃발이 아니다. 사회참여로서의 글쓰기는 사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면서, 동시에 희망으로서의 미래를 꿈꾼다. 나는 그런 글을 쓰고자 한다. 그것이 나의 수필 미학이다.
-저자 이태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