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장의 차이란 말이지.
우리는 먹고살기 위해 필연적으로 소비라는 행동을 취한다. 로빈슨 크루소처럼 28년간 무인도에서 자급하지 않는 이상 누구나 재화를 가지고 세상의 물건을 소비하게끔 되어있다. 그것이 인간사 돌고 도는 기본 메커니즘이다.
라면하나를 끓이더라도 라면, 냄비, 젓가락, 물, 불, 버너 혹은 장작이라는 최소한의 비품들이 따른다.
이는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소비이다. 사람이 쌀만 먹고살 수 없듯 소비의 형태도 날이 갈수록 진화하고 상승 곡선을 그리게 된다. 소비의 총량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국가와 세계의 전체적인 경기 그래프와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돈을 벌지 못하면 외식이나 핸드폰비를 줄이기 시작한다. 하루 두 번가는 스타벅스를 일주일에 두 번 가거나 저가 커피를 마시게 된다. 매주 교외로 나가 바람을 쐬거나 여행을 하던 것에서 벗어나 집돌이 집순이가 되어 게임만 하는 경우도 생긴다.
호황과 풍부한 유동성의 시기는 돌이켜 보면 서민의 입장에서는 오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아주 짧게 스쳐 지나간다. 살림살이가 크게 나아진 것을 체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남들 사는 만큼만 산 것 같은데 왜 나는 자산이 전혀 늘지 않았을까?'
원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알게 모르게 끊임없이 비교하고 소비의 폭을 타인과 저울질하며 살아간다.
이웃이 여행을 간다면 우리도 가고 차를 바꾸면 우리 집 차도 바꿀 때가 된 것 같다. 이는 본격적인 시기와 비교가 아니라 은연중에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안개와 같은 호승심이다. 비교와 경쟁, 승리로 귀결되는 메커니즘이 핏속에 진하게 흐르는 것이다.
우리는 생존에 필요한 필수적인 소비를 제외한 모든 소비는 '과소비'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가 온다.
특히나 지금처럼 매출이 꺾이고 급여가 동결되고 이자가 불어나는 시기에는 말이다. 명품, 외제차, 배달음식, 외식, 여행, 기호식품, 술, 선물, 파티, 과도한 통신비 등으로 나가는 돈은 사실 생존과는 무관한 소비들이다.
늘 사회적인 유행어와 캠페인이 나오는 시기이기도 하다. 유동성을 옥죄고 나면 물가는 안정이 되지만 그때는 소비가 위축되어 기업이 파산하게 된다. 그러면 월급쟁이들은 더더욱 살림살이가 팍팍해지고 또다시 소비가 더 위축되어 국가 총생산이 떨어진다. 떨어진 국가의 GDP를 마치 국가의 자존심 마냥 생각하는 부류들은 어떻게든 소비를 활성화시켜야 한다. 뭐 다른 이유가 있다 해도 그것이 국민을 잘살게 하겠다는 일념이 아닌 것만큼은 잘 알겠다.
여하튼.
욜로며 저녁 있는 삶, 떠나라! 와 같은 구호와 외침들은 한 번뿐인 인생을 '소비'를 통해 완전하게 채울 것을 종용하곤 한다. 파티는 슬슬 시동을 걸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패턴을 4번 ~5번 정도 반복하게 되면 관을 오동나무로 할지 편백으로 할지 결정하는 소비의 순간에 다다르게 된다.
(참고로 나는 화장장을 선택하고 싶다. 특히 관이나 수의, 유골함을 좋은 것으로 하는 행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소비는 인간과 혼연일체 몰아일치의 상황을 연출한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 고 해도 뭐 딱히 반박할 거리도 없다. 사유하기 위한 책조차도 소비해야 하는 입장이니 말이다.
얼마 전 모 지역에서 가장이 아내와 자녀 셋을 흉기로 살해하고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애석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들의 사정 하나하나를 낱낱이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그 살인자인 가장은 소비를 극한으로 줄이고 월세 20만 원짜리 반지하 빌라로 들어가기보다는 다 같이 죽기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만약 죽어서 가는 세상이 있다면 그 가장은 가족들을 무슨 면목으로 볼 텐가.
우리는 늘 한편에 공허함을 안고 살아간다. 그 공허함을 해소하는 가장 간편한 수단은 소비이다.
'나는 소중하니까.'
'나를 위한 작은 선물'
이 XX들을 하며 소비했던 예쁜 쓰레기들은 우리의 공허를 더욱 짙게 만들어 준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지만 공허를 해소할 수단은 없다. 운동을 하고 종교에 귀의를 해도 공허는 해소되지 않는다.
공허는 인간이 세상에 태어남으로 인해 생긴 우주의 어느 공백이다. 그것이 마음에 남아있는 것이므로 이해나 탐구의 대상이 아니다. 그저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하는 영역의 것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그냥 마음 한편에 잘 자리 잡고 있도록 자리를 내어주고 함께 살아야 한다. 블랙홀과 같은 공허를 채우려고 하면 끝없는 고통만이 줄줄이 뒤따를 뿐이다. 빨려 들어오는 괘락과 소비는 일순간 공허를 잠재운 듯 착시를 보일 뿐이다.
부자가 될수록 자연을 끌고 오려고 하고 나이가 들수록 간소하게 살려고 한다. 어른들 생신에는 더 이상 선물로 드릴만한 물건이 없다. 고작해야 화분이나 찻잔, 꽃 정도이다. (물론 현금이 최고지요.) 필요한 것이 적어지는 삶으로 향하는 것이다. 나이 들수록 기쁨이 줄어든다. 큰 소비를 통한 기쁨이 현저히 줄어들고 기한도 짧아진다.
당신의 주변에 당신 스스로 불편을 초래하는 큰 소비가 있었다면 이를 과감히 버릴 줄 알아야 한다. 자산의 형태를 띠지 않거나 지금의 위기를 모면케 해 줄 환금성이 있는 물건이 있다면 처분을 고려해 보라. 금고에 잠자고 있는 돌반지나 커플링도 마찬가지다. (마침 금시세가 최고조이다.) 추억이야 사라지겠지만 지금의 어려움은 조금 나아질 것이다. 어차피 추억이야 50년을 넘기지 못한다. 조금 로맨틱하지 않은 선택이지만 '존엄성'을 잃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일 것이다.
이쯤에서 의문이 든다.
나는 혹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당하고 있는 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