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이의 존재에 감사하라.
나는 나의 생일을 인정하지 못했다. 불행으로 점철된 유년시절에 대한 유일한 반항이었다.
단 한 번도 나는 엄마와 아빠가 함께 나의 생일을 축하하고 촛불을 끄는 생일의 식사자리를 가져보지 못했다.
이러한 연유로 나는 줄곧 나의 생일을 부정해 왔다. 왜 태어나서 이런 고초를 겪는 것인지 원망만 가득한 시간들이었다.
고아원에는 이런 아이들이 수천 명이었다. 자신의 생일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안다 해도 일일이 챙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매년 8월 15일 광복절을 원생 모두의 생일이라고 정해놓고 자축을 했다.
후원자들로부터 과일이나 과자등의 선물이 오곤 했다. 한 반의 인원에 맞춰 생일케이크와 초코파이, 과일 몇 가지가 주어지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상상하기 싫은 그때의 암담한 마음이 떠오르는 듯하다.
30명 정도의 아이들이 케이크 5개를 각 테이블에 올려두고 6명씩 조를 이뤄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초를 입으로 불어 끄는 장면이다. 사실 기괴스럽다는 생각마저 들곤 해서 이 장면을 떠올리기 싫어한다. 부모의 축하는 완전히 빠져있고 버림받은 자식들끼리 서로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에 어떤 절망과 비탄이 자리 잡고 있을는지 상상이나 가겠는가.
나는 위의 서너줄을 쓴 후 오랜만에 눈물을 질질 짜내고 말았다. 35년이 지나도 어제일 같다. 케이크의 모양보다는 아이들의 초점 없는 눈빛과 공허한 손뼉, 단체 테이블의 나무 재질, 종이 접시에 올려진 포도송이, 초코파이가 생각난다. 이런 경험은 결코 유쾌하지 못했고 나는 나의 생일을 정확히 알고 있었음에도 모르는 척 8월 15일이 되면 기계처럼 생일축하 노래를 불렀다.
나는 1980년 음력 7월 14일 2시에 태어났다.
생일이 싫었다. 일부러 피하고자 했고 누군가 기억해주지 않기를 바랐다.
정확히는 그렇게 바란 '척'했다. 나 스스로도 난감했었다. 주는 것 없이 받은 것 없이 서운하고 섭섭한 기분만 드는 날이 생일이라니 그건 참 불행한 생각이었다. 작은 저주에 걸린 듯 생일을 부정하고 일부러라도 마치 나쁜 흉조가 든 날이라고 억지를 부려보기도 했다. 본심은 그게 아니지만 말이다.
나는 2023년이 되고 삶을 반추하며 나에 대한 생각을 고쳐 먹기로 했다. 나의 생일을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생기고 나서야 나는 진심으로 나의 생일에 축하의 초를 켤 결심이 생겼다. 사랑하는 나의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도 생긴 것이다. 나의 존재를 인정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내가 나를 돌보지 않으면 누구도 나를 돌보거나 사랑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렵고 자라지 못한 내 마음의 힘든 부분을 인정하고 사랑을 줄 수 있는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나부터가 나의 존재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축하를 전해야 한다. 당당히 말해보자.
'나의 생일을 축하해 주세요.'
'당신의 축하와 사랑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