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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음날 Mar 29. 2023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있는가.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89년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아이들의 입장에선 당연지사 아닌 것일 거라 생각하지만 어른들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했다. 성적순에 따라 행복이 판가름 나는 경우를 살면서 왕왕 봐왔기 때문일 것이다. 


자녀가 서울대를 간다면 부모의 입장에선 당연히 행복할 것이다. 물론 좋은 대학을 입학한 본인도 얼마든지 행복을 찾아 나설 것이다. 좋은 기업이나 대형 로펌, 의사가 된다면 자연스럽게 어깨에 뽕도 올라가고 행복도가 극한에 다다를 것도 같다. 그래서 동네 어귀에 현수막도 걸고 동네방네 전화를 걸어 사돈에 팔촌까지 아는 사람을 모조리 붙잡아다 자랑을 했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네의 보편적인 행복이었고 지금도 짜달시리(부산 사투리로 '별로' 라는 뜻) 달라진 것 같진 않다. 


이처럼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정도의 광의적인 해석이 뒤따르는 정도라면 행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의 삶에 매우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행복은 돈은 살 수 있을까?

나의 입장을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보편적인 행복'은 충분히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입장이다.

보편적이라는 것 자체가 객관성을 가져야만 하므로 이것은 어떻다 라는 형태의 책정은 불가능하다. 


가령 누군가에게 쌀밥은 바라마지 않는 염원이지만 누군가에게 쌀밥은 만병의 근원일 수도 있다. 

(하얀 백미는 쌀 낱알의 5%에 해당하는 영양분만 가지고 있다. 현미는 땅에 심으면 싹이 나지만 백미는 싹이 나지 않고 썩는다.) 누군가에게 1,000만 원짜리 명품 가방이 행복이지만 누군가에게는 3,000원짜리 에코백이 행복일 수 있다. 행복은 내가 사는 곳 즉 공간, 내가 사는 시점 시대와 나이, 가치관, 사회적 통념, 사회 구성원의 보편적 가치 등에 의해 이리저리 가치가 편향될 수 있다. 


입에 풀칠만 해도 행복하겠다는 시절이 있고 매일 스테이크를 썰고 와인을 곁들여도 공허한 경우가 생긴다. 

사회 구성원의 대다수는 어느 정도 괜찮은 음식을 매일 섭취할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을 느낀다고 답하는 시기가 있을 것이다. 어느 때는 매일 고기나 생선이 주가 되는 메인요리가 없는 식사를 제공받아 불행하다고 답하는 시기도 있을 것이다. 혹은 식탁에 깨끗한 테이블 보와 커트러리 (수저포크세트)와 생화가 놓여있지 않아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는 답변도 있을 수 있다. 이는 마치 계절의 변화처럼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흐름이다. 내가 염원한다 해서 아침이 오지 않거나 겨울이 오지 않는 건 아니다. 


보편적인 행복만 돈으로 구입이 가능하다면 보편적이지 않은 행복은 어떠한 것이 있는가? 이에는 물리적인 것과 영속적인 것이 있다. 안전이 담보된 방 4개 화장실 2개가 딸린 최신식 아파트는 분명 돈으로 살 수 있다. 하지만 그 안을 구성하는 행복한 가족 구성원은 아무래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확언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오랜 시간 합을 맞추고 살아갈 배우자와 슬하의 자녀들과 '사이좋게' '잘' 지내는 것은 환산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젊어서 슈퍼카는 살 수 있지만 옆에 누구를 태울지는 조금은 다른 문제이다. 동승자가 내게 행복을 전해주리라는 기대는 미지수로 남기 때문이다. 결국은 물질보다는 행복이라는 감정 그 자체가 추구하는 영속의 방향으로 지향된다. (다 그렇다는 건 아니고 보통은 그러하다는 정도겠다.)


행복은 추구할만한 가치인가?

그렇다면 행복이라는 감정은 인간으로서 추구할만한 가치 척도를 가진 감정인가?

이것 또한 나는 아니라는 입장으로 조금 선회를 한 상태이다. 


'행복을 추구한다.'


이 말은 다분히 모순적인 부분이 있다. 

행복은 사실 추구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나 영속적인 행복은 추구는 쉬워도 도달은 훨씬 어려운 편이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행복에 준하면 훨씬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가령 결혼을 하면 행복할 거야 라는 부분은 목적형이기에 결혼을 어떻게든 '달성'하는 것은 가능하다.  (범죄의 유형이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그 후의 행복은 완전한 미지수의 영역으로 남게 된다. 아이를 낳는다고 무조건 행복이 담보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행복감을 느끼는 것에 목적을 두고 살아간다는 것은 다소 나약한 성향을 내포하고 있는 것도 같다. 자칫 행복을 추앙하는 태도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행복을 우선하기 위해 강인해야 할 시점에 더 편안하고 나이브한 선택을 하게 될 확률이 올라간다는 것을 뜻한다. 그 차이는 눈에 띌 만큼 확연하지 않으나 세월이 흐르면 확연히 눈에 띄는 경우가 생긴다. 


고통을 선택하는 대신 적당한 수준의 인내로 시간을 볼모로 내보내는 선택을 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는 나의 타당한 자세로 포장하고 무심결의 흐름에 의식을 떠맡기듯 흘려보내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흐름 속, 행복을 추구한다는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단어 뒤로 은신하는 것은 결국 이도저도 아닌 행복 즉 돈으로 살 수 있는 정도의 행복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과연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당신만의 행복이 맞기는 한가?


서두에 이야기했듯이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을까? 

보편적인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있다. 

그렇다면 보편적 행복에 객관성을 버릴 수 있는가?

주체적이며 개인에게 맞는 궁극의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다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추구하는 행복은 보편적인 것인가 주체적이고 주관적인 궁극의 행복인가? 

그것은 추구한다고 얻어지는 행복인가?

추구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행복을 어떻게 관념적으로 대해야 하는가?


행복을 추구한다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행복의 표피만을 갈망하는 행위이다. 

영속적인 행복은 당신의 내면에서 찾을 수 있는 당신 고유의 '무엇'이다. 

그것은 추구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급발진 구간)

행복을 갈망하지 않고 추구하지 않은 채 수행을 이미 선택한 자 만이 어렴풋이 뒤따르는 행복의 실체를 은연중에 느끼는 것이다. 알아챘으나 알아차리려 하지 않고 뒤돌아 안으려 들면 안 된다는 것을 아는 상태를 행복에 이르렀거나 행복에 다다랐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완전한 개인의 의견일 뿐이다.)


행복이란 두 팔 벌려 맞이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매우 황당한 이야기로 들릴 소지가 다분하다. 그간 배워온 행복의 정의와는 사뭇 다른 형태이기 때문이다. 행복은 마치 풍성하게 내 품에 안기는 커다란 풍선이나 솜이불처럼 확실하게 잡히는 것이라고 은연중에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네 잎 클로버처럼 행운은 네 잎이지만 행복은 세잎인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과는 결이 다른 이야기 이기 때문이다. 행복은 세잎과 네 잎을 가늠하고 있는 나와 풀밭 땅, 공기, 햋살, 모두를 포함한 시공간과 나라는 존재 그 자체가 아닐 수도 있음을 역설하는 것이다. 


'이게 뭔 개소리야?'


돈을 좇지 말고 사명을 좇으라 그러면 돈은 저절로 따라올 것이다. 

행복을 추구하지 말고 하루를 충만하게 살아내어라 어느 순간 행복이 슬금슬금 은연중에 뒤에 와있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때 뒤돌아 서지 말라. 안으려 하지 말라. 소돔과 고모라에 나오는 롯의 아내처럼 확인하려 하지 말라. 저 멀리 등뒤를 일렁이는 행복의 느낌을 무시하고 동시에 감사하며 다시 일터로 생활의 전선으로 내던져져라. 


행복이 당신에게 조급함을 느끼는 순간이 우리가 잠시 느낄 수 있는 행복의 극이다.


- 어제저녁 잘 삶은 수육 한 접시에 행복해진 8살 딸아이가 보리차가 든 컵으로 건배를 제의했다. 

어느 누구라도 컵을 들지 않거나 넷이 한꺼번에 잔을 부딪치지 않으면 다시 건배를 해야 했다. 편식이 심한 아이가 오랜만에 스스로 밥을 잘 먹고 연신 고기가 맛있다며 남은 고기 한조각도 더 먹겠다 해서 기분이 좋았다. 

요즘 들어 이것보다 더 큰 행복을 찾아보지 못했다. 


왈왈~


통후추 스무알만 넣고 45분 정도 삶은 수육이다. 삼겹살 400g 목살 400g  딸아이는 나와 식성이 비슷해서 삼겹살 수육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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