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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음날 Apr 20. 2023

소년

조막만 한 손을 꼼지락거리며 꾸지람을 듣고 있었다. 꼬질꼬질한 손가락 끝에는 까만 초승달이 10개나 떠있다.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꽤나 중한 일이 분명했다. 소년은 혼이 나는 건지 취조를 당하는지 분간이 가지 않는 방안의 무거운 공기를 차마 깊게 들이마시지 못하고 있다. 매캐한 물질이 농도를 짙게 만든 게 분명하지만 그것이 소년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기에 별달리 말할 것도 없었다.


꼬치꼬치 캐물은 질문에 답할 만큼 스스로도 자세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 팔각형의 성냥을 긋다 긋다 신문지에서 볏짚으로 옮겨 붙이고는 안방의 옷장 속에 숨어버린 기억 이외에는 별다른 기억이 없다. 헛간옆의 장작더미에서 큰 불이 났고 동네의 모든 양동이가 동원되어 불을 끄느라 한바탕 대소동이 일었다. 불길의 발화자는 나였고 나는 큰 질책을 당하는지도 모른 채 지겨워했다. 차라리 두들겨 맞았어야 했다. 흠신 두들겨 맞는 편이 교육면에서나 전시효과로써나 자그마한 지역 사회에 경종쯤을 울리는 사례가 되었을 것이다. 의외로 손찌검 대신 용서를 받았다. 할머니의 가냘픈 팔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었을까. 


아마도 동네가 난리가 났겠지만 큰 소리가 나거나 매질을 당하진 않았다. 아마도 작고 사소한 일에는 크게 혼을 내더라도 목숨이 달린 일에는 놀란 가슴보다 자식을 잃을까 하는 마음이 더 컸으리라 짐작해 본다.


혼나는 게 지겨워 한숨을 쉬어본다. 그럴 분위기가 전혀 아닌데 말이다. 집에 불을 지르고도 잘못을 자각하지 못할 만큼 어렸다. 얼마나 철이 없었던지 돌부리에 걸리면 돌부리를 탓하지 부주의한 나를 탓하지 못할 나이였다. 순수한 청정 이기주의를 지녔지만 누구도 고까워하지 않을 나이였다.




자분자분 솔길을 거닐다 뭉근하니 밟히는 질감에 꽤액 소리부터 질러본다. 푸짐하게 싸놓은 소똥을 발목 깊이 박힐세라 펄쩍 뛰었다. 구수한 들녘의 냄새가 내 발에 옮겨 붙었다. 한 발을 질질 끌며 영역표시하든 가는 길의 고운 풀마다 소똥을 바르며 조금이라도 내가 깨끗해지길 청정해지길 희망했다.


기다란 벼를 하나 쑤욱 뽑아 얇게 다듬어든다. 잎사귀마다 앉아 가을을 만끽하는 통통한 메뚜기들을 거둬들였다. 벼에 달린 낱알은 저녁밥공기에 열리지만 메뚜기는 내 손에 잡혀야 상에 오를 수 있다. 그래서 당시의 나에게는 메뚜기가 더 귀했다. 얌전히 앉아 있지 않아도 이리저리 눈길 닿는 곳마다 메뚜기가 무수히 있었다. 길가에 떨어진 동전을 줍는 신나는 마음으로 한 줄에 삼사 십 마리씩은 족히 꿰어 두 세줄을 만들어 어깨에 척 걸쳐 매었다. 아직 명을 다하지 않은 메두기들이 볏단에 등이 꿰인 채 발버둥 쳤다. 굉장히 많은 다리가 꼼지락 거리며 벼 줄기 하나를 수놓았지만 사그락거리는 소리에도 클라이맥스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관현악단의 맨 뒤에 있는 솥뚜껑 만한 커다란 심벌즈의 순서 말이다.


아궁이에 불이 붙고 들기름으로 자글 하게 달궈진 검은 무쇠솥이 준비를 마친다. 기다랗게 꿴 메뚜기를 넣고 뚜껑을 닫은 후 쭈욱 빼들었다. 검은 무쇠솥 안은 순식간에 지옥이 펼쳐진다. 오전에만 해도 따스한 가을 들녘에서 벼와 함께 따스한 풍광의 가을을 즐기던 메뚜기 입장에서는 무슨 변고인지 모를 일이었다. 천지를 향해 마구마구 뛴다. 다리가 부러져라 뛰어도 온몸을 치근대는 뜨거운 들기름에 바삭바삭 말라가는 껍질이 더더욱 고소해질 뿐이다. 수백 마리가 한솥에 튀겨지고 맛소금을 휘 뿌려 뒤척여진다. 할머니는 절에 다니시느라 살생을 하면 안 된다며 뜨거운 물도 마당에 붓지 않으셨지만 어쩐 일인지 메뚜기에게만큼은 자비가 없으셨다. 소복이 쌓인 튀긴 메뚜기를 한 공기 퍼담아 따로 비축해 두셨다. 혹여라도 아들이 늦게라도 와 술상을 차려야 한다면 내놓을 심산이신가 보다.


아빠는 집에서 술을 마시는 일이 거의 없었다. 어지간해서는 바깥에서 이미 만취, 고주망태가 되어 귀가하는 게 일상이었다. 할머니의 헛된 기대는 착한 아들이 정신 차리고 집에서 조용히 한잔 하는 모습을 기대하셨을지 몰라도 그건 할머니 살아생전에 목격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메뚜기 입장에서도 까끌한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슨 잘못이 있다고 튀겨지고 대접도 못 받을 남자의 술상에 기대 없이 오른단 말인가. 소임을 다하기엔 글렀다.



한글이 재밌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엄마라고 부르라는 아줌마는 구불거리는 사자머리 웨이브에 보라색 원피스를 착용하고 나타났다. 어찌나 몸에 착 달라붙는지 마치 뱀 같이 매끄러워 누구라도 그 아줌마의 직업이 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술집과 여자는 몰라도 그 아줌마가 어디에서 뭘 하는지 6살인 나도 어렴풋하게나마 예측이 되었으니 말이다.


아줌마의 과거 따위는 궁금하지 않았다. 단지 소반 위에 공책을 올려두고 한글을 가르쳐 주는 열의를 보여준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엄마도 못한 노릇을 술집여자 아니, 새엄마가 해주었다. 엄마노릇이 필요한 어른과 사랑받고 싶은 장래의 고아가 만났으니 꽤나 괜찮은 장면이 나온 것에 감사했다. 


오래된 고택의 기와와 널찍한 마루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한글 공부를 하는 아이가 대견했다. 고마운 아줌마는 시어머니가 맘에 안 들었는지 아빠의 술주정 혹은 주머니의 크기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삼일을 지내지 못하고 인사도 없이 사라졌다. 40년이 되어가지만 그때의 그 보라색 원피스에 딱 붙어있는 아줌마의 올록볼록한 몸매는 잊히지가 않는다. 역시 사람은 자신감이다.


"놀러 나가자."


술에 취한 아빠가 느닷없이 대낮에 들어와 나가자고 제안했다.


"안돼. 공부해야 해."


한글에 한창 맛이 들려 공부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아빠는 무엇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나를 집어다 힘껏 던졌다. '읔' 소리와 함께 문지방 모서리에 얼굴을 정통으로 박았다. 나는 집이 떠나가라 울지도 못하고 얼굴이 퉁퉁 부은 채 꺼억꺼억 울어 젖혔다. 공부한다는 아들을 죽어버리라고 던지는 아빠를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 행동은 아빠라는 남자의 모든 미래를 바꾸는 행동이었다. 아마도 그 보라색 원피스 아줌마에게 뜯긴 뭔가에 분노했고 그녀가 남긴 유산인 공책으로 공부를 하고 있는 내가 꼴사나워 보였을 수도 있다. 내 나이 7살 즈음이었다.


아빠란 남자를 나는 그렇게 떠나기 시작했다. 지난하고 길기만 한 지겨운 가출의 역사를 상세히 읊어볼 생각은 없다. 다만 아빠는 죽기 전까지 거의 30년 동안 나와 1분의 매몰찬 통화 한 번을 했을 뿐 아들에게서 어떠한 관심도 받지 못하는 형벌 속에 간질환으로 객사하고 만다. 결혼식에도 초대받지 못했고 두 손주를 안아보지도 못했다. 그가 젊은 날의 실수와 방탕으로 바꾼 것은 미래의 온전한 행복이었다.


자식이 결혼하고 손주를 둘씩이나 낳아도 며느리 얼굴, 손주 얼굴도 보지 못하고 삶을 마감해야 하는 지옥이 있다. 그건 자신의 손으로 창조해 낸 지옥이다. 아들을 문지방에 던져 처박을 때 이미 지옥은 펼쳐지고 말았다. 그날 던져졌던 소년이 아빠가 되었고 나이가 들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나이 말이다.


'나는 아빠처럼 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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