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음날 Jul 29. 2023

가장 익숙한 이와의 이별이 필요할 때

우리는 살면서 어쩌면 가장 비장한 각오가 필요할 때가 있다. 

그것은 나와의 이별이다. 

물리적인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그건 솔직히 편리한 편에 속한다. 


변화의 필요가 기존의 안정을 넘어서는 시기가 오면 필연적으로 선택할 것은 지금까지의 익숙한 나와의 이별뿐이다. 그 뿌리 깊은 익숙함, 편안함, 안락함이 어쩌면 인간이 누려야 할 궁극의 감정들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바꾸려는 것은 스스로를 괴롭히기 위함이 아니다. 

내면의 전복을 꾀함으로 파괴를 지향하려 함도 아니다. 


익숙하고 편안한 나의 기저와 바닥, 심연에는 진득한 불안함이 가득 차 있다. 

우리 인에 내재된 기본적인 불안의 상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판으로 나를 옮기고 싶을 때 처절한 변화를 스스로에게 요구한다. 불안한 현재와 미래와는 판이한 형국을 원하는 것이다.

반드시 그 필요가 현재의 안락함을 뛰어넘을 때만 방아쇠가 당겨지는 것이다. 


알아차림과 멈춤이다. 


나와의 지긋지긋한 데이트를 이쯤에서 끝내기로 작정하는 것은 상당한 고통을 수반한다. 

굳이 사랑하는 연인과 가족과의 생이별을 떠올리지 않아도 된다. 그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차원의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다. 이 고통은 근원적으로 헤어짐의 고통, 이별의 고통과는 다른 무언가를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와 헤어질 수 없다. 

죽음이 우릴 갈라놓는다 해도 라는 정도의 너절한 노랫말도 이것과는 상이하다. 

죽음은 소멸의 단계이지 헤어짐의 단계가 아니다. 

형국이 달라지는 것을 굳이 끌어올 필요는 없다. 


어제의 나와 어떻게 하루아침에 이별할 수 있는가. 

공간과 시간의 제약이 철저하게 나를 따른다. 

이사를 가야 하고 나라를 바꾼다 해도 지구상 어딘가에 살고 있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다른 시간에 다른 것을 먹고 다른 옷을 입고 다른 이를 만나거나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 해도 나라는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나를 나로 규정짓는 것은 나의 숨 쉬듯 먹고 싸고 자며 반복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7년마다 달라진다고 한다. 

누군가는 1년 6개월마다 세포가 새것으로 완전히 바뀐다고도 한다. 

12 간지가 있고 별자리가 있고 카르마가 있다. 

인간은 내, 외면의 변화와 순환에 관심이 많았다. 

어느 곳에서는 윤회를 바라며 어느 곳에서는 윤회의 사슬을 끊어내기 위해 업을 쌓기도 한다. 

천국에 가고 싶은 열망에 봉사를 하기도 하고 기도를 하기도 하고 자폭테러를 하기도 한다. 

지옥에 가고 싶은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마치 지옥에 가기로 작정한 듯 사는 사람도 많다. 


우주가 이유 없이 생겨났다면 누군가 천국과 지옥에 가는 것도 이유가 없을 것이다. 

우주의 모든 것은 원자의 단위로 보자면 무로 돌아갈 수 없다. 전체의 질량은 그대로 보존될 뿐이다.

미지의 존재가 우리를 프로그래밍했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 흔적을 어딘가에 남긴다. 

무로 돌아간다는 것은 세상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뜻하지 원자단위의 무로 돌아간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지구상에서의 우리가 가진 질량을 우주로 흩어 뿌린 것을 단지 죽었다고 표현할 뿐이다. 


이와 같이 물리적인 죽음의 정의가 다분히 분명한 무언가라면 나와의 이별은 죽음보다 고차원적인 무언가를 의미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죽음보다 덜 규정지어진 진행형의 미래 행위이며 개인의 성찰과 깊이 있는 사유를 통해 완성될 수도 있고 완성될 수 없기도 하기 때문이다. 


당신에게는 분명 이유가 있다. 

다만 그 이유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로 살아갈 뿐이다. 

각자의 이유를 찾으려면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은 나로 인해 비롯되며 과거의 나와 이별을 고할 때를 우리는 필연적으로 맞이하게 된다. 

나에게 질문을 할 때이다.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작가의 이전글 스스로를 사랑해야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