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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음날 Aug 07. 2023

나의 걱정인형

나는 걱정이 태산 같은 사람이었다 

기우.

정말 하늘이 무너질까 두려워 도무지 제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

그게 나였다. 


이런 사람이 자동차는 어떻게 타며 비행기는 어떻게 타고 다니는가?

나는 자동차도 비행기도 그다지 좋아하거나 선호하지 않는다. 

외형과 기술에 대한 경탄은 있으나 그에 비례해 안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놀이기구나 오토바이 등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의지력으로 조종이 어렵거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급적 피하는 성향이다. 

소행성이 갑자기 지구를 덮치는 상상을 하거나 해수면이 높은 곳에 살아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상상에 휘말리기도 한다. 

이는 과민함과 예민한 성격, 소심한 인자와 결합해 내 안에 커다란 걱정인형을 만들어냈다. 


나의 걱정인형은 나의 인생을 참 다양하게 간섭하곤 했다. 

교통수단부터 일상의 자잘한 선택 특히나 업무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오지랖을 보여주기도 했다. 

특히 무슨 일이든 혹시라도 "잘 될 것"이 두려워 일을 도전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곳에는 걱정인형이 도사리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기는 하는가?

일이 '잘'되고 혹시라도 '성공'할지 몰라서 걱정하는 사람 말이다. 


'이 일이 되면 다른 일이랑 겹쳐서 도저히 진행이 안될 거야.'

'어차피 이건 해도 좋은 이야기 못 들어. 나쁜 평가가 기다리는데 왜 하나.'

'해도 실적이나 이익이 나지 않을 거야.'

'어차피 실패해. 이런 건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게 좋아.'


"어차피"

"어차피"

"어차피"


입버릇처럼 내뱉는 어차피라는 단어는 아주 당연하게 나의 인생을 점점 코너로 몰고 갔다.


나는 사장도 아니면서 이런저런 핑계와 갖가지 이유를 대며 어떻게든 일을 적게 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부정적인 말과 비관적인 의견을 쏟아내며 완벽한 기회가 찾아올 때만을 기다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아찔하다. 

조직 안의 누군가는 나의 이런 이면을 꿰뚫어 보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을 것이었다. 


걱정인형은 불안을 먹고 산다. 

불안은 모든 일을 악화시키고 안 좋게 하는데 일가견이 있는 감정이다. 

아무리 좋은 것도 불안을 앞에 붙이면 극적으로 안 좋은 것이 되어버린다. 


'불안한 부자'

'불안한 행복'

'불안한 안전'


인간의 기저에 '불안'이 깔려 있다는 건 단지 불안한 인간이라는 표상을 넘어 한 인간을 지독한 비관과 절망의 늪으로 끌고 가는 케이블에 몸이 단단히 묶인 것을 의미한다. 

불안의 늪은 끈덕지고 도무지 포기를 모른다. 

밝고 경쾌한 기분으로 불안을 몰아내었다 해도 어느 순간 혹은 잠을 자는 와중에도 슬며시 다가온다. 

옆자리에 소리 없이 누워서는 귓가에 속삭이는 것이다. 


'대출금은?'

'앞으로 뭘 하고 살래?'

'내일 오전 면담은?'

'그 친구랑 싸운 건?'


불안은 걱정으로 포장한 고민거리들을 끝없이 던져두고는 나의 내면이 포장지를 하나하나 까는 것을 기다렸다. 그리고 다시 다른 색상의 포장지를 찾아 같은 고민거리를 재포장하는 것이다. 

걱정인형은 이 모든 사이클의 지휘자이다. 

어찌 보면 굉장히 능숙하고 노련하기까지 하다. 

한 인간을 아주 오랫동안 걱정의 상태에 머무르게 할수록 그것은 유능하니까 말이다. 


걱정인형을 버려야 한다. 

걱정인형을 버리는 것은 의외로 대단히 간단하다. 


그렇게 대단하다고 설명했던 걱정인형을 한순간에 버리기 쉬운 존재라 설명한다고?

걱정은 그렇게 간단하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고?

불안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고 긍정적인 마음이 생겨나지 않는다고?

살면서 계속해서 고민거리들은 발생할 거라고?

부정적인 태도가 팽배한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하고 사느냐고?

이 위험한 세상 걱정이 오히려 나의 안전을 지켜주진 않느냐고?


와글와글한 내면의 아우성이 들리는 듯하진 않는가.

당신의 복잡한 내면은 걱정인형이 자신의 집을 잃어버릴까 봐 들려오는 환청이다. 

버려진 걱정인형은 정말 갈 곳 없이 소멸하기 때문이다. 


걱정인형을 내보내라. 

어떻게?


"나가줘."라고 한마디만 하면 된다. 

좀 더 친절하고 강한 어조로 차분하게 "나가"라고 되뇌면 된다. 

굳이 욕을 하며 난리를 피울 것도 아니다. 


걱정인형을 인식하고 나가라는 말은 하루에 100번도 넘게 되뇔지도 모르니 말이다. 

불안을 양손 가득 들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걱정인형을 떠올려 보라. 

그 녀석에게 이별을 고하자. 

이제 그만 안녕이라고 말하라. 

서서히 떠나갈 것을 권유해 보자. 


불안할 때마다 외쳐라. "나가!"

걱정이 몰려올 때 외쳐라. "나가!"

부정적인 망상이 몰려올 때, 망상 속에 사로잡힐 때, 미래에 대한 걱정, 과거에 대한 원망, 부모, 친구, 지인, 애인, 직상상사, 후배 모든 주변인들의 나의 걱정의 대상이 될 때 외쳐라. "나가!"

돈걱정, 대출걱정, 가까운 누군가와의 비교, 질투하는 마음, 시기하는 마음이 생기거든 외쳐라. "나가!"


"내 머릿속에서 나가! 그만!"


생각을 멈추라. 

멈추라고 명령하라. 

나가라고 단단한 어조로 부드럽게 외쳐라. 

그만하라고 외쳐라. 


그러면 된다. 

부정적인 태도를 긍정으로 바꿀 수 있다. 

하지 않으려는 핑계를 하고자 하는 의욕으로 바꿀 수 있다. 

타인을 신경 쓰지 않게 되며 비교하지 않게 된다.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게 되며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의 경계를 알게 된다. 

바꿀 수 있는 것은 '본인'뿐이며 내가 변화하면 모든 것이 바뀐다. 

바꿀 수 없다면 도망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세상을 길게 보고 스스로를 관조할 수 있는 태도를 지니게 된다. 


걱정인형에게 말해보자.

이제 그만 나가달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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