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이 엄습해 올 때 당신은 삶을 어떻게 헤쳐나가시는지. 아니, 삶이라는 표현은 너무 거창한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눈앞에 닥친 지금을 어떻게 살아가시는지 궁금합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 시간이라는 거대한 그림자가 저를 조금씩 좀 먹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알게 되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알게 된 순간부터 나는 나로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나와, 또 다른 나의 동행이 시작된 것이지요. 당신도 그런 느낌을 느낀 적이 있으시겠지요.
그림자가 나를 죽이겠다고 달려들었을 때, 안나를 만났습니다. 세상에 우연은 없다고 하지만, 그와의 첫 만남은 우연이 아니고야 설명 할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내가 도시를 떠나 초록이 가득한 이 한적한 곳으로 이사를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죠. 비가 폭포처럼 쏟아지는 날에 우연은 시작되었어요.
아침에 눈을 뜨니 창문 밖 세상은 먹구름에 가득 차 망망대해에 떠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온몸이 축축하고 무겁게 느껴졌어요. 더 이상 이 기분으로 다시 잠들 수도 없었고, 자리에서 일어나 할 수 있는 일도 없었습니다.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는데 그 순간 숨이 막혔고, 발로 이불을 박차고 몸을 일으켰습니다.
몸과 마음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느껴졌어요. 잠옷을 입고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서울에서 생활한 오랜 습관이겠지요. 한적한 시골이라 해도 남의 눈을 아예 신경 쓰지 않을 순 없었습니다. 거울에 비친 나를 보니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숨 막히는 서울을 떠나 원하는 곳으로 왔지만 내 꼴은 더 비참해 보였습니다. 빗질을 하고 카디건을 걸치고 무작정 밖으로 나갔습니다.
초록과 녹색의 차이를 아시는지요. 비에 젖은 초록은 짙은 녹색으로 진한 향을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나는 들이마시고 내쉬며 숨이라는 걸 자각했어요. 양말도 신지 않은 채로 신발은 다 젖어가고 있었는데, 발 옆에 생전 처음 보는 벌레가 어디론가 열심히 가고 있었습니다.
요정이었을까요? 작은 빗물 구덩이 때문에 날개가 젖어 움직이질 못하더군요. 요정이라 부르겠습니다. 새끼손가락만 한 그 요정에게 천천히 손을 내밀었습니다. 요정이 경계하길래 치마를 펼쳐 보이니 폴짝 올라오더군요. 나는 빗물에 젖은 날개를 닦아주었습니다. 그때 나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정신을 잃은 것이지요. 이게 안나를 만난 우연의 일이었어요. 아직은 그 순간을 무어라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조금 나아져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또 편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