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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는 여행중 Aug 06. 2023

볼리비아 나한테 왜 이래

나 홀로 남미여행 - 5일 차

  리마행 비행기가 한 시간가량 연착되었다. 현재시간은 밤 12시 반. 한 시간 반안에 볼리비아 항공 표를 발권받고 출국심사를 하고 비행기에 올라타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이제는 이 모든 임무를 30분 안에 완수해야 했다. 이미 늦었을 거야 하고 체념하는 머리와 달리, 포기하지 못한 내 다리는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이게 그 '중요한 건 꺾여도 그냥 하는 마음' 뭐 이런 건가?


  볼리비아 항공은 국제선 항공사 발권 창구 중에서도 가장 구석에 박혀있었다. 직원은 헐레벌떡 뛰어오는 나를 보자마자 백신접종증명서를 꺼내라고 했다. 내가 숨이 찬 상태로 '라파즈?' 하고 묻자 오분 남았다고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일단 살았다는 생각으로 재빨리 탑승권을 발급받고 출국수속장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다른 난관에 봉착했다. 출국수속 줄이 어마어마하게 긴 것이었다. 나는 기지를 발휘해 직원에게 내 탑승권을 가리키며 ‘por favor’를 연속으로 세 번 외쳤다. 이는 내가 유일하게 아는 몇 안 되는 스페인어로 ‘please’라는 뜻이다. 그러자 직원은 나를 옆쪽으로 빼주었고, 나는 기다리지 않고 바로 수속받을 수 있었다. 음식이 잘못 나와도 그냥 먹는 평소 내 성격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다시 달렸고 게이트 앞에는 라스트콜이라는 문구가 크게 쓰여있었다. '세이프'라는 의미였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좌석에 앉아 이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찰나, 이게 무슨 일인가. 산타크루즈 행 비행기도 출발하지 않는다. 다행히 한국인 패키지 관광객 분들이 계셔서 이분들 따라가면 어디라도 가긴 가겠구나 생각했다. 결국 산타크루즈 도착은 이미 다음 비행기 출발 시간보다 늦었는데, 라파즈로 가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 건진 모르겠지만 라파즈행 비행기도 이미 연착되어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나에게는 마지막 난관이 있었으니, 바로 비자 발급이었다. 그렇다. 나는 볼리비아에 입국하기 전에 미리 비자를 발급받지 못했다. 도저히 입국 전 비자를 받을 겨를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도착비자 준비물인 현금 100달러와 항공 및 숙박 예약확인서 그리고 영문 통장 잔고 내역까지 챙겨갔다. 다행히 금세 발급이 마무리되었고 마침내 라파즈행 비행기에 올랐다.


드디어 볼리비아로


  우여곡절 끝에 라파즈에 도착했다. 볼리비아의 수도인 라파즈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도이다. 전날 쿠스코에서 먹은 뜨끈한 라면 국물 덕분에 다행히 고산은 이제 완벽적응된 상태였다. 시간은 오전 8시 반 정도였고 나는 공항에서 환전을 하고 유심을 구매한 뒤, 잠시 앉아 폰과 내 몸을 충전시켰다.


  페루라는 나라는 그래도 비교적 많이 접하고 충분한 정보가 있었기에 큰 두려움은 없었는데, 상대적으로 생소하고 낯선 볼리비아는 사실 좀 두려움이 있었다. 다행히 쿠스코 한인민박에서 만난 분과 라파즈에서 우유니로 넘어가는 일정이 겹쳐 만나기로 했다. 공항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버스터미널로 이동했다. 버스터미널에서 예약한 버스회사에 갔는데 우리가 예매한 10:15분 버스가 취소돼서 9시 버스로 우리를 이동시켰다고 했다. 이 정도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냥 피식 웃음만 살짝 나올 정도? 하루는 온전히 라파즈 구경을 해야 했기에 짐을 맡기고 터미널을 나왔다.


  우선 걸어서 무리요 광장으로 향했다. 무리요광장으로 가는 길은 사람들이 엄청 많은 번화가였는데, 막상 광장 바로 주변은 경찰과 군인들에 의해 출입이 통제되고 있어 사람이 적었다. 아마도 이 주변에 정부 관련 건물들이 포진되어 있어서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여권을 경찰에 보여준 뒤에야 우리는 무리요 광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무리요 광장은 페루의 아르마스광장과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규모는 훨씬 작았다. 그리고 비둘기가 가득했다. 나 홀로 집에의 비둘기 아줌마가 연상되는 한 컷을 남기고 근처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 갔다. 정확한 가격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물가에 비해 비싸다는 느낌을 받아 내부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성당 뒤쪽으로 좀 더 걸어가면 마녀시장이 나온다. 마녀시장이라는 이름이 내 호기심을 조금 자극했는데 이름만큼 오싹한 장소는 아니었다. 그냥 이것저것 다양하게 팔고 있는 다채로운 색감의 시장 거리였다. 나는 여기서 '볼리비아스러운' 바지를 하나 샀다. 줄무늬가 인상적인 천으로 된 붉은 바지였다. 사실 그 무엇보다도 날이 너무 더웠는데 드디어 나이키 기모 바지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점에 나는 만족했다. 거리를 걷다 보면 상점에 곳곳에 걸린 미라로 된 새끼 라마가 눈에 띄는데, 새 집을 지을 때 라마를 마당에 묻으면 행운이 온다고 한다.

마녀시장과 새로산 바지를 입고 한껏 표정이 밝아진 나

  마녀시장에서 얼마 멀지 않은 거리에 한국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식당이 있었다. 가게명은 Cafe Febrero. 2월이었다. 우리는 각각 라면을 하나씩 먹고 공깃밥을 하나 시켜 나눠먹었다. 한국분이 운영하시는 곳 같았는데,  삼겹살과 잡채밥도 팔고 있었다.  라면은 계란이 국물에 풀어져서 나오지 않고 삶은 계란이 고명처럼 올려 나온 점이 특이했다. 맛이 없을 수 없었다.


  밥을 먹고 텔레페리코를 타러 갔다. 텔레페리코는 라파즈와 위성도시 엘알토까지 이어지는 케이블카로, 놀랍게도 여기서는 대중교통이었다. 이는 라파즈의 거대한 분지 모양의 험난한 지형 때문이었는데, 텔레페리코를 타고 한눈에 내려다보는 라파즈의 광경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났다. 시간이 많이 남았던 우리는 결국 모든 라인을 한 번씩 다 타보았다. 그 사이 나는 웅장한 장관 그 이상의 라파즈의 많은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공책을 품에 안고 있는 학생, 엄마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아이, 꽃을 한 다발 들고 계신 할머니. 순간 우리 동네 마을버스가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텔레페리코 안에서는 볼리비아 사람들의 지극히 일상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풍경으로만 느껴졌던 오밀조밀 붉은빛의 벽돌집들 이면에 고도가 높아질수록 가난해지는 라파즈의 빈부격차를 관찰할 수 있었다.


텔레페리코에서 바라본 라파즈


  이제 슬슬 어두워진다. 내가 가입돼있는 남미 카페에서 시위 때문에 우유니로 가는 길이 막혔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조금 불안했다. 그래서 버스시간까지는 아직 꽤 남았지만 일찍 터미널에 가서 물어보기로 했다. 야경은 케이블카에서 짧게 본 것으로 만족하고 우리는 버스회사로 달려갔다. 다행히 정상운행! 마음이 한시름 놓여 터미널 안의 치킨집에서 요기를 했다.


  그런데 9시 거의 다 되어서 누군가 우리 쪽으로 다가온다. 길이 막혀 차가 갈 수 없다는 것.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 짧은 여행을 하는 나로서 교통편을 놓치는 것은 큰일이었다. 라파즈까지 얼마나 고생해서 왔는데 우유니를 가지 못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멘털 붕괴 현상이 막 시작되려는 와중에 옆에서 계속 '우유니~ 우유니~' 하고 크게 외친다.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가지도 못하는 우유니 왜 자꾸 부르는가 싶어 물었더니, 자기네 회사 버스는 시위대가 안막은 길로 돌아서 갈 수 있다고 한다. 나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오케이, 결재할게 바로. 근데 여권 보여주고 막 돈을 지불하려던 찰나, 갑자기 원래 예약한 회사도 갈 수 있다고 한다. 아직 환불을 못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아주머니께 죄송하다고 한 뒤 다시 돌아갔다. 근데 또 웬걸, 아니었다. 결국 결재하기 일보직전이었던 옆 버스회사로 돌아갔다. 나는 데자뷔인 듯 'por favor'를 세 번 연창 하며 우리를 탑승객으로 부디 받아달라고 부탁했다. 아주머니는 한번 떠나간 우리를 살짝 언짢아하셨지만 다행히 너그럽게 태워주셨다.


  오후 10시 반, 우유니로 향하는 버스에 겨우 올라탔다. 그리고 현재 시간은 11시. 버스 상태는 크게 나쁘지 않다. 좌석도 넓고 등받이도 150도 정도 눕혀진다. 이제 제발 자고 일어나먼 우유니였으먼 좋겠다.


  라파즈는 나에게 짧은 시간 안에 악몽과 추억을 모두 선사한 도시로 평생 잊히지 않을 것이다. 두려움을 가득 안고 도착한 볼리비아였지만 나는 오히려 왠지 모를 편안함을 느꼈다. 여기도 다 같은, 사람 사는 세상이구나. 길고 힘든 하루였지만 볼리비아에 대한 내 첫인상은 좋다. 어쩌면 이런 게 내가 진짜로 바랬던 여행일지도라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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