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에서 만난 겨울왕국

by 장미화


이스탄불은 아직 기온이 들쑥날쑥이다. 여전히 비는 자주 오지만, 한낮 기온은 18도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확실한 건, 봄이 손짓한다는 것이다. 우리 집 주변으로 빨갛고 노란 색채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조그마한 꽃을 틔우고 있다. 봄 여름을 좋아하는 나지만, 이 겨울을 보내기가 문득 아쉬워진다. 튀르키예에서의 마지막 겨울. 우리는 이 겨울의 끝을 잡고, 튀르키예의 '겨울왕국'이라 불리는 울루산으로 향했다.


튀르키예 부르사에 있는 ‘울루산’은 서아나톨리아/마르마라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특히 겨울에는 인기 있는 스키 관광지다. 울루산의 스키 시즌은 12월부터 3월 말까지로, 이 기간엔 언제라도 맘껏 눈구경을 할 수 있다고 들었다. 지인이 작년 1월 방문했을 때 설경이 무척 아름다웠다고 한다. 나는 아이들에게 잔뜩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다.


“얘들아! 지금 울루산 정상에 올라가면 완전히 겨울왕국이래!!”


그러나 울루산에 가까워올수록 불안감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아침 기온이 13도. 이건 그냥 봄날씨였다.


AI에게 물어보니 뒤통수 때리는 답을 내놓는다.

이번 주말 울루산 케이블카 타고 올라가면 눈을 ‘확실히 많이’ 보는 건 어렵지만, 진눈깨비 비슷한 상태를 볼 가능성은 남아있어요.


‘하아… 이거 대참사네. 진눈깨비는 이스탄불에서도 질리도록 봤는데.’


나는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진 입을 열었다.


“얘들아, 우리… 꼭 겨울왕국을 봐야 된다는 집착을 버리자. 저 풍경 좀 봐라. 크으~~

이 자체를 보러 온 거야 우리는!!”


첫째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엄마… 아니, 뭔 소리야. 우린

겨울왕국이라 그래서 온 건데?"


둘째도 보탠다.


“아 엄마, 뭐야~~ 눈썰매 못 타면

난 여기 안 올걸.”


나는 그만 미안해져서 모기만 한 소리로 중얼댔다.


“아니 뭐, 눈이 없다는 거는 아니고… 조금, 쪼끔은 있을 거야. 설마…”




13도, 10도, 7도, 5도, 3도…

구불구불 산 위로 올라갈수록 기온이 뚝뚝 떨어진다. 정상에 가까워오니 길 양옆으로 드디어 눈이 보이기 시작한다. 희끗희끗 보이던 눈이 커브를 돌 때마다 늘어난다. 이제 빙하를 떠올릴 만큼 두터워진다. 용암이 굳은 지층처럼 단단하고 견고하게 쌓인 눈을 보며 감탄한다. 이렇게까지 다른 세계라고? 나는 흥분해서 외쳤다.


“야!! 맞지? 엄마가 뭐랬니! 겨울왕국 이랬잖아!!!”


아이들도 신이 나서 방방 댄다.

“진짜 엄마 말이 맞았어! 겨울왕국 맞네!! 완전 말 그대로 딱 겨울왕국이야!!”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밭을 걸어갈 때 벅차오르는 것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그리운 감정과도 비슷했다. 무릎까지 빠지는 정도로 쌓인 눈을 밟아보는 것이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내 기억으로 그때 난 여덟 살이었다.


왜 그 이후론 서울에 그렇게까지 폭설이 내린 적이 없을까, 왜 많이 내린다 해도 겨우 내 발목 정도일까, 생각했었다. 그게 아니라 내 키가 컸기 때문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작았기 때문에 무릎까지 폭닥 빠졌던 것일 테지. 한 손엔 아빠, 다른 한 손엔 엄마의 손을 잡고 있었는데 우리는 무언가를 사러 시장에 가는 길이었다. 하얀 눈 위로 발을 디디면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데, 눈 밑바닥이 완전히 빙판이었다. 나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스케이트를 신은 아이처럼 비틀거렸다. 두터운 눈 속에서 작은 발이 미끌미끌 종종거리고, 내가 ‘어~어어!!’ 하며 중심을 잃을 때마다 엄마 아빠는 양쪽에서 내 손을 꽉 잡아 나를 공중으로 살짝씩 들어 올렸다. 그러고 시장을 가는 내내 우리는 끊임없이 웃었다.


문득 내 오른손에 엄마, 왼손에 아빠의 온기를 느낀다. 이제 따듯해진 손을 들어 내 아이들의 손을 잡는다. 내딛는 발을 쑥쑥 잡아가는 눈밭을 성큼성큼 걷다가 폴짝폴짝 뛰어가다가 푹, 넘어지기도 한다. 둘째는 새하얀 눈을 한 움큼 집어 슬쩍 맛을 본다.

어깨가 떡 벌어진 아저씨가 썰매를 타고 신나게 내려올 때의 티 없는 웃음. 그것은 어린아이의 것이었다. 썰매가 없는 이는 비닐 봉다리나 포댓자루 같은 것을 구해다 타고 있었다. 눈밭을 기어올라가 장대만 한 고드름을 따며 낄낄대는 청년들, 눈 위에 벌러덩 누워 팔다리를 버둥대는 중년들, 하나같이 입이 귀에 걸려있다. 단체사진을 찍으려고 포즈 잡고 서있는 대가족의 뒤를, 가속도 붙은 썰매가 들이받아 모두가 도미노처럼 자빠진다. 그들은 다 같이 눈밭을 뒹굴며 박장대소를 했다. 화를 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눈.

이 기묘한 기상현상은 마음속 잠들어 있던 그리운 감정들을 한없이 불러냈다. 그래서 어른의 영혼을 아이의 시간으로 되돌려 놓았다.


이제 울루산을 내려간다.

3도, 5도, 7도, 10도, 13도…

밑에서 눈 쌓인 산의 꼭대기를 아득히 올려다본다.

두터운 잠바를 살며시 벗는다.

미련 없이 이 겨울을 보내줄 수 있을 것 같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