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 기념품 구경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스탄불이 3년간 내가 ‘살 곳’이 아닌, 마냥 낯설고 신기한 ‘관광지’ 일 때였다. 이스탄불에 오면 일단 제일 먼저 찍고 보는 '아야 소피아'에 갔다. 사원을 보고 구시가지를 돌아보니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카펫이었다. 한국이었다면 관심도 안 가졌을 이국적인 카펫들에 나는 그만 홀리고 말았다. 그중 카펫뿐 아니라 예쁜 쿠션들이 진열되어 있는 한 상점이 발길을 붙들었다. 딱 봐도 가격이 비쌀 것 같은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상점이었다. 나는 쿠션 커버만 살 작정으로 용기 있게 상점에 발을 디뎠다. 상점에 들어서자 동그란 안경의 해리포터를 닮은 청년이 반가운 미소로 맞이했다.
나는 화려하게 빛나는 카펫들엔 눈길도 주지 않고 쪼그려 앉아 쿠션 커버만 뒤적거렸다. 그러자 해리포터는 슬쩍 곁에 다가와, 내가 고르는 쿠션커버와 느낌이 비슷한 제품들을 귀신같이 찾아와 보여주었다. 그의 얌전한 친절이 마음에 들었던 나는, 비로소 고개를 돌려 카펫들을 훑어봤다. 본디 내 취향이 이런 화려함이었던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때부터 해리포터의 카펫 펼치기 신공이 시작됐다.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마치 마법의 양탄자를 펼치듯 화라라락… 또 다른 것으로 눈길을 돌리면 마술처럼 들어 올려 화라라락… 그쯤 되니 이제 해리포터가 알라딘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알라딘은 내게 신발을 벗고 카펫 위를 걸어보라 했다. 그래야 고급 카펫의 진가를 알 수 있다고. 나는 홀린 듯이 신발을 벗었다. 카펫 위에 발을 딛는 순간 퐁신퐁신한 촉감이 기가 막혔다. 가격이 비싼 것과 저렴한 것의 차이도 쿠션감에서 확연히 느껴졌다. 마법의 양탄자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양손으로 부드러운 촉감을 음미하던 나는 재스민 공주가 되어 사뿐히 날아갈 지경에 이르렀다. 용기 있게 가격을 물었다.
내가 황홀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카펫은 200만 원이라 했다. 나는 공손히 카펫에서 내려와 신발 속에 주춤주춤 발을 꿰었다. 알라딘은 곧바로 계산기를 가져왔다. 얌전한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갑자기 "강남스타일~"을 부르며 자신이 한국을 너무 좋아하니 나에겐 특별히 150만 원에 해 준다 했다. “150만 원… 어, 일단 알았고. 요 앞 카페에 있는 남편 데리고 올게.”
남편에게 150만 원이란 가격을 이야기하니 한 번 가서 구경이나 해보자 한다. 정신을 차려보니 남편도 신발을 벗고 카펫 위를 걷고 있었다. 물욕이 없는 남편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눈빛을 보니 그도 이미 재스민 공주가 되어있었다. 우리는 조금 더 저렴한 것 중 품질이 좋은 것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알라딘은 이제 램프의 요정 지니가 되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흥정 끝에 80만 원 낙찰을 보고, 맨 처음 사려던 쿠션커버 두 개는 덤으로 얻어 기분 좋게 상점을 나왔다.
한 달 뒤 카파도키아에 갔다. 한국인들이 많이 간다는 카펫 가게에 들렀는데, 그곳에서 내가 구매한 카펫과 똑같은 카펫을 보고 말았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가격을 물었다. 내가 산 것의 절반 가격이었다. 나는 깊은 탄식과 함께 이 카펫을 한 달 전 두 배 가격에 샀노라고 말했다. 상점 주인아저씨가 물었다.
"이걸 어디서 샀다고…?"
"이스탄불 아야 소피아 앞에 있는 카펫 상점에서."
"그럼 절대 비싸게 준 거 아니야. 잘했네…
아야 소피아 앞에서 샀다는 의미가 있잖아.
그걸로 된 거야.
너는 그냥 가장 비싼 장소에서 카펫을 산 것뿐이야."
"아… 그렇구나."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으나, 마음 한 구석이 시린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몇 달 뒤, 갈라타 타워를 구경하러 간 나는 한 상점 앞에서 또다시 마음을 빼앗겼다. 바로 알록달록한 튀르키예 전통 조명이었다. 주인아저씨는 진짜 중요하게 봐야 할 것은 조명이 아닌 조명 받침이라고 침을 튀겨가며 설명했다. 싸구려 제품은 조명 받침이 기성품이지만, 이 상점의 조명 받침은 백 퍼센트 수작업이라고 한다. 망치로 일일이 쇠를 두드려 문양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었다.
며칠 뒤 친구와 바자르에 갔더니 터키 조명을 무척 저렴하게 팔고 있었다. 내가 산 것의 절반 가격도 되지 않았다. 그곳에서 친구가 구매한 조명은 크기도 아담하고 정말 예뻐 보였다. 순간 내가 갈라타 타워 앞에서 산 조명이 떠올랐다. 백 퍼센트 수작업이라는 말도 죄다 부질없게 느껴졌다. 대관절 조명인데 손으로 두드렸든 발가락으로 두드렸든 알 게 뭐람.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색감만 볼 것을. 카파도키아의 카펫 가게에서 느꼈던 감정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최근에 만난 지인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터키에서 터키석 사본 적 있어요?”
나는 터키에서 터키석을 사본 적도, 샀다는 얘기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자 지인의 얼굴은 거의 흙빛이 되었다.
“아, 역시… 나 여행 갔다가 터키석을 백만원주고 샀는데…”
나는 깜짝 놀랐다.
“백만 원이요??”
카파도키아에서 일일 투어를 신청해서 여행하던 중간에 쇼핑몰 일정이 있었다고 한다. 지인이 구매한 터키석은 절이나 성당에서 파는 묵주 같이 생긴 팔찌였다. 그는 순간 무엇에 씐 듯 터키석을 구매했으나 찜찜한 마음에 AI에게 물어본 모양이다. AI가 말하길, 그 터키석이 진짜 최상품이라면 당신은 좋은 가격에 구매한 것이지만 터키에서 진짜 터키석을 찾는 것은 하늘에 별 따기 수준이라고 했단다.
나는 그 희박한 가능성을 뚫고 당신이 산 터키석은 진짜일 거라고 말해주었다. 요새는 AI가 헛소리를 할 때도 많다더라며 위로했다.
문득 카파도키아 카펫 가게 아저씨의 말을 떠올렸다. 너는 아야 소피아 앞에서 카펫을 샀고, 그걸로 된 거라고 했던 말.
200만 원을 주고 카펫을 샀든, 100만 원을 주고 터키석을 샀든, 여행지에서 내가 사는 것은 ‘기억’인 것 같다. 내가 그 기념품을 구매할 당시의 추억을 사는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이 가게에서 샀으면 옆 가게에 들어가서 가격을 물어볼 이유가 없다. 굳이 알아서 뭐 하겠는가. “내가 그때 터키석 백만원주고 샀잖아. 잠깐 정신이 가출했었나?”, “이 카펫 말이야, 우리 아야 소피아 앞에서 80만 원 주고 샀는데, 카파도키아에서 40만 원에 팔더라”며 떠들어댈 수 있는 이것 또한 추억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