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한 파묵의 <순수 박물관> 넷플릭스 시리즈가 공개됐다. 튀르키예의 넷플릭스 시리즈 시청률 1위를 차지한 것은 당연하고, 평점도 8.3/10으로 높은 편이다. 그러나 한국 평점은 형편없다. 물론 그마저도 왓챠피디아의 소수 리뷰를 기반한 것이지만 약 2.3/5이다. ‘넷플릭스 순수 박물관’으로 검색하고 슬쩍 훑어보니 역시나, 혹평이 난무한다.
변태 시끼…
이런 걸 보느라 낭비한 내 시간이 아깝다.
열두 살 어린 여자 인생 망쳐놓은 미친놈.
그냥 못. 난. 놈.
다 맞다. 그런데 이게 다는 아니다. 대부분 그렇듯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들의 작품세계는 간단치 않다.
<순수 박물관>과 나란히 언급되는 넷플릭스 시리즈가 있다. 같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마르케스의 <백 년의 고독>이다. 내게는 <백 년의 고독>이 아닌 <백 년 동안의 고독>으로 기억되는 이 작품은 대학 시절 처음 알게 됐었다. 몇 장 읽다 보면 혼란에 빠지고, 다시 맨 처음 가계도로 돌아간다. 이것을 무한반복하다 포기해 버린 데 반해, 파묵의 <순수 박물관>은 술술 읽혔다. 물론 다음 내용을 궁금하게 만드는 작가의 뛰어난 문장력 덕분이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은 수두룩 빽빽했다.
<백 년의 고독>을 읽기 힘든 것이 문체 때문이었다면 <순수 박물관>을 읽기 힘든 것은 내용 때문이었다. 약혼녀와 내연녀 사이에 참 맑게 걸쳐 있는 그의 모습에서 뚜껑이 열렸다. 퓌순이 사라지기 전까진 나도 약혼녀 시벨의 입장에서 소설을 따라갔었다. “이쯤에서 그냥 솔직하게 말해 이 짐승 시끼야…” 하는 말이 육성으로 터져 나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론, 이 책을 중간에 포기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케말의 모든 생각과 감정을 친절히 알려주는 문장으로 접해도 불편하고 처절한 이 사랑이 드라마로 나온다… 마치 내가 ‘못난 놈’ 대변인이라도 된 듯 걱정이 앞섰다. 나쁜 사랑, 변태적인 집착 안에만 가두기엔 그 이외의 매력이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매력이고 뭐고 기본 줄거리 자체가 일단 불편하다. 문장의 아름다움이나 시대를 품은 서사의 감동을 드라마에 녹여내긴 힘들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드라마를 다 보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기대한 것보다 훨씬 좋았다. 나는 이 드라마에 높은 평점을 주고 싶다.
특히 주인공 케말 역을 맡은 셀라하틴 파샬르는 맞춤옷을 입은 듯하다. 그가 케말 역을 맡자 주변에서 이렇게들 물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정답이다. 케말은 스스로를 ‘이상하고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무력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항복하고 싶은 심정을 느끼곤 했다.
드라마 속 셀라하틴은 케말 그 자체였다. 행동 하나하나가 한없이 유약해 보이면서도 어둡고, 웃을 때는 묘한 백치미가 흐른다. 셀라하틴은 말한다.
케말은 자신의 선택보다는 부유한 환경이 정해준 순서대로 떠밀려 살았다. 진정한 행복이 무언지 모른 채 그것이 행복인 줄 알고 살았던 것이다. 사람은 저마다의 행복이 있다. 남들이 갖는 것을 가져야 행복한 사람이 있고, 남들이 갖지 못한 것을 가져야 행복한 사람이 있다. 많은 것을 가져야 행복한 사람이 있고, 적은 것을 가져야 행복한 사람이 있다. 끊임없이 무언가 성취해 내야 행복한 사람이 있고, 고요하고 단출한 것이 행복한 사람이 있다.
케말이 상류 사회에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었다면, 그토록 간절하게 퓌순을 찾아 헤매며 만난 가난에 질려버렸을 것이다. 자신이 몸담은 세계와는 너무도 다른, 진흙투성이 빈민가가 싫어 다시 상류층의 완벽한 여인 시벨에게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케말은 단 한 번도 시벨을 그리워하지 않았다. 그는 시벨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다. 케말이 퓌순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시벨과 결혼하고 상류사회의 친구들과 유흥에 취해 살았을 것이다. 모두가 행복이라 말하는, 그러나 자신은 그곳에 완벽히 속할 수 없다는 원인 모를 이질감을 느끼면서 말이다.
이스탄불의 거리가 퓌순의 환영으로 가득했고
눈앞에 있다가도 한순간에 사라졌습니다. (…)
퓌순과 가깝다는 것 말고도
그 거리에서 기분이 좋았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부유한 아버지의
서구적인 생활방식 때문에
난 삶의 단순한 면을
보지 못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때
진흙투성이 빈민가에서
인생의 잃어버린 중심을
찾아 헤맸지요.
드라마 <순수 박물관>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이다. 케말은 퓌순 뿐만 아니라 그녀가 속한 서민의 풍경을 사랑하게 됐다.
오르한 파묵은 한 인터뷰에서 “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문득 <백 년의 고독>의 작가 마르케스가 쓴 다른 작품 <콜레라 시대의 사랑>에서 사랑을 콜레라로 착각하는 내용이 떠오른다. 많은 작가들이 ‘사랑’을 ‘질병’과 유사하다고 본다. 어디 작가뿐이랴. 우리는 누구나 ‘사랑의 열병에 걸렸다’는 표현을 심심찮게 사용한다.
내가 굳이 ‘못난 놈’ 케말을 옹호하고 싶은 이유다. 그는 못난 놈이 아니라 속수무책으로 당한 놈이다. 통제 불가능하고,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삶을 통째로 삼켜버린, 사랑이라는 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