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할아버지의 기차 여행을 추억하다
내가 직접 겪어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수없이 상상해보던 광경이 있다.
어릴 때 할아버지와 둘이 시간을 보낸 적이 많았다. 밤이 되면 할아버지가 해주시곤 하던 옛날이야기 레퍼토리 중에 본인이 세 살 무렵 경험했던 기차 여행도 있었다. "아주 어릴 때니 물론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기차가 덜컹하고 출발하니 차창 밖 나무들이 앞으로 안 가고 자꾸만 뒤로 '자빠지는' 거야! 그 광경이 어찌나 신기했던지!"
옛날 이야깃거리가 다 떨어질 때면 해주시곤 했던 '실화' 이야기였고, 나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천진난만한 어린아이가 창문 위로 머리를 내밀고 뒤로 자꾸만 '자빠지는' 나무들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모습을 상상하고 키득거리곤 했다.
머리가 자란 후에는 옛날이야기는 거의 다 잊고 그 일화만이 머리 속에 남았다. 실화여서였을까. 할아버지는 1929년생이니, 그 열차는 아마도 대전쯤에서 부산으로 출발하는 경부선 열차였을 것이다. 빈농의 자식이었으니 열차를 타고 여행을 했을 리 만무하고, 농사가 영 시원치 않았을 어느 해, 증조부의 결심에 따라 가족들이 모두 일본으로 이주하게 된 것일 테다.
그 여행의 종착역은 어디였을까? 도쿄나 오사카의 조선촌이었을 수도 있고, 거기까지 가긴 너무 멀어서 후쿠오카 인근에 정착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1930년대 초에는 고향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으로 보통 이주했다고 하니, 충청도 사람들이 많이 사는 어느 마을에 거처를 정하셨을 게다. 할아버지께서 기차여행 이야기를 해주실 때 나는 너무 어렸고, 그 지역이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묻지 못했다. 나중에 철이 들어 아버지와 삼촌, 고모들께 이 이야기를 하며 할아버지가 일본 어디서 사셨는지 혹시 들으신 적 없으시냐고 여쭤봤지만, 한창 먹고살기 바빴던 시절에 할아버지는 자식들에게 그런 이야기까지 해주신 것 같지는 않다.
제설작업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 지역에 살다 보니 밖이 온통 꽁꽁 얼어 있어서, 오늘은 온종일 집에서 아이와 함께 지냈다. 이제 갓 두 돌을 넘긴 아이가 곤히 자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갑자기 할아버지의 그 열차 생각이 났다. 아마도 아들과 비슷하거나 조금 컸을 어린 할아버지가 열차를 타고 ‘우와~’ 하며 탄성을 질렀을 광경이 좀 더 생생히 그려졌다. 그리고 이전과는 달리, 어린 아들을 등쳐 업고 일자리를 찾아 정든 고향을 떠나는 증조할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렸다.
열차 속 가족들을 돌아보며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나와 비슷한 또래였을, 그 시대의 그는.
해방 후에 증조할아버지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할아버지가 유년기를 일본 어느 지역에서 보내셨는지는 여전히 내 인생 최대의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과연 언제 그 수수께끼를 풀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한 번쯤은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나 삼대가 더불어 할아버지가 살았던 마을을 방문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필부였던 증조부와 조부의 삶이 지금의 우리에게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배움의 기회가 되리라.
때로는 시간이 지나야 조금 더 맥락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이야기들이 있다. 할아버지의 ‘뒤로 자빠지는 나무’도 그중 하나였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다 예상치 못한 폭설 덕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