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옵션 B의 삶
페이스북의 최고 운영책임자(COO)이자 베스트셀러 ‘린 인(Lean In)’으로 유명한 셰릴 샌드버그(Sheryl Sandberg)가 그녀의 두 번째 책인 ‘옵션 B(Option B)’를 출간하고 이를 홍보하기 위한 순회 출판기념회를 연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지난 3월 말, 마지막 학기가 막 시작했을 즈음이었다. 졸업을 앞두고 좋은 추억이 될 것 같아 (그리고 저자 사인이 담긴 책도 같이 준다기에!) 신청을 해놓고는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6주가 지나 버렸다. 그리고 졸업식만을 앞둔 지난 목요일 아침, 셰릴 샌드버그의 이벤트가 있다는 사실을 아이폰 캘린더가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역경에 맞서고, 회복탄력성을 키우며, 삶의 기쁨을 찾는 법에 대한 이야기
4월 24일에 출간된 따끈따끈한 신간인 옵션 B의 부제는 역경에 맞서고, 회복탄력성을 키우며, 삶의 기쁨을 찾는 법(Facing Adversity, Building Resilience, and Finding Joy)이었다. 셰릴 샌드버그가 2년 전 갑작스럽게 남편을 잃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겪은 경험을 심리학자인 애덤 그랜트(Adam Grant)와 함께 정리하며 쓴 글들을 엮어 낸 책이라는데, 셰릴과 ‘린 인’의 유명세를 생각하면 곧 한국에서도 번역 출간되지 않을까 싶다.
예정된 오후 5시 30분을 조금 넘어 시작한 대담은 방청객 질문까지 포함하여 약 한 시간 반 가량 이어졌다. 길지 않은 대담의 대부분은 새 책의 핵심 주제인 회복탄력성(Resilience)에 대한 셰릴의 경험과 인식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녀는 어린 두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으로서, 남편의 부재라는 충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마치 써보지 않은 근육을 키우는 것처럼 회복탄력성도 길러야 한다는 것, 그리고 어려움이 있다면 숨기지 말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눌 때 보다 쉽게 극복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는 이야기를 담담하지만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오늘 하루 겪는 작은 것들에도 그저 감사하면서 살자는 그녀의 메시지는 사실 다른 자기 계발 및 심리치유 관련 책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자신의 아픈 경험을 자양분으로 삼아 육성으로 전달하는 말 한마디 한 마디에는 분명히 적잖은 울림이 있었다.
It doesn't get better everyday, but it does get better with time, and look for the small moment of joy.
행사가 끝나갈 즈음, 한 방청객이 던진 말이 날아와 가슴에 박혔다. 실은 얼마 전에 아버지를 잃었다고. 그래서 그 젊은 여성은 사실 자기보다도 이 자리에 함께 와 있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위로의 말을 전해줄 수 있는지를 셰릴에게 부탁했다. 셰릴은 기꺼이 정중한 위로를 전했다.
그때, 나는 어머니에게 셰릴의 말을 그대로 전해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매일같이 좋을 수는 없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작은 기쁨들이 쌓여가며 나아질 거라고. 셰릴 같은 유명한 사람도 다 마찬가지라고.
셰릴을 만난 날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00일째 되는 날이었다. 돌아가신 날 이후로 당신 꿈을 꾼 적이 거의 없는데, 지난 3일간 내내 꿈속에서 뵐 수 있었던 건 졸업을 축하해주기 위함이셨을까. 비록 더 이상 아버지가 없는 Option B의 삶이지만, 어머니를 비롯한 남은 가족들과 함께 작은 것들에도 감사하며 즐겁게 살라는 말을 남기고 싶으셨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집 뒤로 나 있는 숲길을 어머니와 함께 걸을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다 보면 불현듯, 고향집 뒷산을 오르며 바라봤던 아버지의 등이 생각난다. 어머니도 말씀은 없으시지만 마찬가지 심정일 게다. 한 시간 남짓한 짧은 산책길이지만, 잠시나마 매일같이 어머니와 함께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이 순간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덧붙이는 글 (2019/11)
만 2년간의 미국 MBA 생활을 마무리할 즈음,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경영인을 직접 만나는 흔치 않은 경험을 했다. 하지만 그날은 페이스북의 최고위 경영자 셰릴 샌드버그를 만났다기보다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고 난 후, 글쓰기를 통해 상처를 치유하고자 애쓰는 작가로서의 셰릴 샌드버그를 만났던 날로 더욱 기억되는 날이다.
한국어로 번역된 'Option B'를 다시 찾아 읽어보며 그녀에게 새삼 적잖은 빚을 지고 있었음을 새로이 느낀다. (Option B는 2017년 10월에 한국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겉으로는 덤덤한 척 괜찮은 척하고 있었지만 속은 그저 텅 비어있었던 그 봄날에, 가족의 상실이라는 고통을 먼저 겪은 인생 선배로서 써 내려간 그녀의 책을 읽으며 위로받던 느낌이 책을 읽는 동안 다시 되살아났다.
더 이상 옵션 A로서의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지만, 예상치 않았던 옵션 B로서의 삶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는 깨달음. 그 깨달음이 나를 한 발짝 더 세상 앞으로 나갈 수 있게 해 주었다. (가능성은 굉장히 희박하겠지만) 나중에 언젠가 셰릴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된다면, 그때 꼭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 당신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어서, 차분히 읽을 수 있어서 나 역시 슬픔 속에서 조금 더 빨리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늘 최고의 옵션만을 당연시하며 살아왔던 그간의 인생을 되돌이켜보는데 당신과의 우연한 조우가 너무나 소중한 길잡이가 되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