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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밥천국, 그리고 뺑끼묻은 옷

2. 태어날 때부터 아빠는 아니니까

by 자민

여름날 점심에 라면을 먹는다는 건 보통 내 머릿속엔 없는 일이다. 일본식 라멘도 아니고 얼큰한 라면이라면 더더욱. 함께 일하던 동료가 갑자기 라면이 땡긴다면서 잡아끌지 않았다면 굳이 햇빛 따갑게 내리쬐는 날씨에 김밥천국에 가서 라면을 시키진 않았을 것이다.


점심시간의 김밥천국은 줄을 서야 할 만큼 붐볐다. 이미 긴 줄이 늘어선 분식집을 두세 개 지났기 때문에, 다른 곳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꼼짝없이 줄을 섰다. 을지로에서 삼천 원짜리 라면 먹는 것도 꽤나 노력이 필요하구나... 이런 생각을 하며 슬쩍 안을 들여다봤더니, 주변 공사현장에서 일하시는 듯한 분들 여럿이 앉아 바쁘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리저리 페인트가 묻어있는 그분들의 옷차림을 보고 있자니, 아주 자연스럽게 아버지 생각이 났다. 아니, 실은 아버지는 조금 후에 생각났고, 장례를 모두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장롱에 있는 옷가지들을 버리려고 꺼내어 하나하나 정리하던 장면이 더 먼저 떠올랐다.


페인트로 얼룩진 아버지의 작업복들, 그리고 아껴 입는다고 채 몇 번 입지도 못한 채 고이 모셔져 있던 그나마 상태 좋은 작업복들도 모두 비닐봉지에 집어넣었다. 어차피 재활용 수거함에도 못 넣을 옷들이 왜 그리 많았던지.


아버지는 좋게 말해 지방 작은 중소기업의 관리자였고, 까놓고 말하면 건설업 먹이사슬 맨 끝에 있는 손바닥만 한 하청업체에서 사장과 직원들 사이에 끼인 채 고생하는 월급쟁이였다. 전국 공사장을 전전하며 막노동에 가까운 일을 수십 년간 해야 했던 아버지의 옷가지에는 언제나 뺑끼, 그러니까 페인트가 묻어 있었다.


밥을 먹고 있는 아저씨들의 옷차림은, 내가 언제나 봐왔던 아버지였다. 좀 깔끔하게 하고 다니시라고 타박도 하고 그랬던... 계속 보고 있자니 지금이라도 식당 구석 어딘가에서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며 일어설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 오늘 또 이렇게 아버지랑 만나네.


이런 느낌이 이제는 점점 익숙해져 간다. 살아계실 당시에 조금 더 당신의 삶을 이해할 수 있어서, 고생하셨다는 말이나마 한 마디 더 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으랴마는, 이제는 그냥 아들의 일상 속에서 이렇게 가끔씩 불쑥불쑥 찾와주시는 것만으로도 그저 좋기만 하다.


아빠, 엄마 오늘 고졸 검정고시 등록했어요. 이번에는 전과목 합격할 수 있게 힘 좀 써봐요 좀. 생전에 시험운이야 없으셨다지만, 그래도 거기서도 아내 생각하신다면 로또번호는 아니라도 이 정도는 해주셔야 할 것 같은데 안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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