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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광장, 그리고 공룡메카드

4. 네 할아버지는 말야

by 자민

덥다.


에어컨의 영향권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뜨거운 온기가 훅 끼쳐 들어온다. 한국이 이렇게 더웠던가? 싶어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그래도 1994년 기록을 아직 깨지는 못하고 있단다. 응답하라 1994의 무대였던 그 1994년. 그래서 갸우뚱.


1994년이면 중학교 1학년이었는데, 그해 여름이 특히나 덥다고 느끼진 못했다. 그 해 여름을 돌이켜 보면, 항상 벗의 자전거 뒤에 올라타 신나게 달렸던 기억, 그리고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이 어디서나 울려 퍼졌던 기억 외에는 특출나게 생각나는 게 없다.


오히려, 1990년 초반 여름날의 기억이 더 강렬하다.


그때까지 대전역 광장은 대통령 선거의 주요 유세장이었을 만큼 넓은 공간이었다. (과거 면적만 놓고 보자면 서울시청 광장보다 더 큰 규모였다.) 여름이 되면, 더위를 피하러 나온 시민들이 나와 삼삼오오 모여 돗자리를 폈다. 대전역 바로 앞에 살았던 우리 가족도 그 인파들 중 한 무리였다.


한여름 열대야 속 광장에 누워있어 봤자 얼마나 시원했을까 만은, 그렇게 느낄 법한 이유가 있었다.


조그마한 식료품 가게 한편에 딸린 방 한 칸에서 살았었던지라, 여름에는 음료용 냉장고, 그리고 아이스크림 냉장고 두 대에서 나오는 열기가 빠져나가지 못하고 가게 안을 맴돌았다. 에어컨은 상상도 못 하던 시절이었고, 창문도 없는 막힌 공간은 여름만 되면 찜질방으로 변했다. 안에 있는 것 자체가 곤욕이었다. 아무리 무더운 여름날이라도 가게 밖이 백 번 나았다.


악착같았던 어머니는 그 찜통 속에서도 자정 무렵까지 문을 열어놓고 장사를 하셨다. 쉬이 잠들 수 없는 환경이니, 아버지와 나, 동생은 돗자리 하나 펴 들고 여름 내내 근처 대전역 광장을 찾았다.


아버지는 돗자리 위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하셨다. 동생과 돗자리 위에서 투닥거리느라 땀에 푹 젖었을 때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은 서늘해서 좋았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피서였지만, 돌이켜보면 그저 좋은 기억이다.


얼마 전, 대전에 다녀올 일이 있어 대전역에 내려 광장을 지나는데 이제 30년이 다 되어가는 그 여름날 생각이 났다.


대전역 앞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포장마차 속 어딘가에서 가락국수 한 그릇 시켜두고 소주 한 잔 하고 있는 아버지 모습이 그려졌다. 올해처럼 무더운 여름이더라도, 맥주는 술이 아니라며 거들떠도 안보셨을 것이다. 해 질 녘이 되면 한 잔 기분 좋게 걸치고 나와서는, 광장으로 나서셨을 것이다. “정민아, 돗자리 가져오자.” 이렇게 말하시면서.


주말이 아버지 귀 빠진 날이다. 살아계셨으면 예순네 번째 생신. 어머니는 은하수공원을 찾아 또 통곡하시겠지. 성묘길에 동행하는 대신, 아들이 죽고 못사는 공룡메카드 뮤지컬을 함께 보러 집을 나섰다. 돌아와 맥주 한 캔 따는 것으로 아버지를 추억한다. 한여름에 태어나 60년 남짓 사시는 동안, 아들에게 좋은 여름밤 기억을 남겨주고 가신 아버지를 닮기 위해서 조금이나마 노력하는 중이라고 위안한다.


아빠 속도 모르고 돌아오는 길에 수현이가 타박을 준다. 이렇게 재미있는 뮤지컬을 보는데 어떻게 아빠는 잘 수가 있냐고, 전혀 이해를 못하겠다는 모양새다. 뭐라뭐라 하는 것 보니, 커서도 오늘을 기억할 성 싶다.


좋은 아비가 된다는 것, 생각보다 힘들지? 이렇게 귀에 대고 말씀하시는 것만 같다. 흥, 그래도 오늘은 아빠보단 아들이 먼저라구요. 내리사랑 모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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