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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민 Jan 26. 2022

시간 - 마흔에게 전하는 최인아의 말

직장생활 영감사전 25 - (5) 시간

① 인생 1막과 2막 사이, 전환의 시간이 궁금합니다. 삼성 최초의 여성 부사장직을 내려놓을 당시 어떤 마음이었나요.


42~43세부터 내가 주목한 건 시간이었어요. 시간이 줄고 있다는 자각이 아주 선명하게 다가왔습니다. 돈에 비유하자면 추가 수입 없이 통장 잔고에만 의지해 사는 삶이에요. 잔고가 줄어들고 있다고 생각하면 돈을 아껴 쓰게 되잖아요. ‘시간이 줄어드는데 이렇게 쓰는 게 맞나?’ 하는 생각이 강했어요. 우리는 번아웃을 겪거나 큰 계기를 만나면 보통 ‘어떻게 살지?’ 하는 질문을 하게 되잖아요. 이 질문은 추상적이어서 생각의 출발점을 발견하기 어려워요. 생각을 바꿔봅니다.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도 될까?’로. 그렇게 생각하니 회사를 그만두는 게 아주 쉬웠어요.”


② 회사를 그만둔 걸 후회한 적은 없었는지요.


“없어요. 단 한 번도. 잘 나왔다고 생각해요. 보통 회사 밖은 춥다고들 하는데, 나에게 퇴사는 어디가 춥고 따듯하고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앞서 말했듯 시간에 대한 질문과 맞닿아 있었죠. 당시 삼성 이건희 회장은 삼성에서도 여성 사장이 나와야 한다고 했고, 실제로 내 이름이 하마평에 오르내리기도 했어요. 하지만 나는 만약 사장이 되더라도 그건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당시 광고계는 디지털포메이션이 화두였어요. 에너지와 시간을 아주 많이 쏟아야 따라잡을 수 있는 상황이었죠. 그때 내가 나에게 던진 질문은 ‘너 거기에 에너지를 그렇게 쏟을래?’ ‘네 시간을 그렇게 보낼래?’였어요. 답은 ‘노’였죠.


③ 스스로에게 질문을 계속하다 보면 ‘이거구나!’ 하는 답변이 찾아오나요? 그렇다면 언제 어떤 형태로요?


“네, 와요. 많은 경우 우리 고민은 ‘어떤 것이 나에게 유리할까?’ 혹은 ‘나에게 더 좋을까?’죠. 물론 이 질문도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하지만 마흔 살 이후에는, 즉 반생 정도를 산 이후엔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고민에 도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계속 살 거야?’를 물어야 합니다. 그 질문을 품고 돋아나는 생각을 지웠다가 새로 들였다가 하면서 숙성시키다 보면 ‘아~ 이거구나’ 하는 답이 찾아옵니다.”


④ 자기 질문을 오래 품는 것이 왜 중요한가요.


“이건 좀 과격하게 써주세요. 지름길에는 덫이 있어요. 강남의 영어학원 간판을 보세요. 죄다 ‘단기 속성’을 내세웁니다. 단기로 몇 달 만에 영어를 배우는 사람이 영어를 잘할 수 있을까요? 모면하겠다는 거죠. 그러면 해법이 안 생겨요. 방법은 결국 스스로 찾는 거예요. 저마다 해결 방법은 다 다르거든요. 나에겐 효과가 있었지만, 다른 사람에겐 안 맞을 수 있어요. 왜? 우리는 서로 기질도 다르고, 환경도 다르며,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이 다르니까요. 그래서 어떤 시스템을 도입할 때는 신중해야 해요. 무언가를 시작할 때 무턱대고 해외 선진 시스템을 들여온다고 되나요? 안 되잖아요. ‘왜 그럴까?’에 대한 생각이 선행되어야 해요.


⑤ 사명감과 소명의식이 강한데, 평소 그런 단어 사용을 꺼리는 걸로 압니다. 추상적이고 거창해 보이는 말을 쓰는 걸 극도로 경계하지요? 왜 그런가요?


“맞아요. 나는 거창하고 거룩한 단어를 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인간이 그렇게 합리적인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부분적으로만 가끔 합리적일 뿐입니다. 중2 겨울방학 때 본〈암흑가의 두 사람〉이라는 영화가 생각나요. 알랭 들롱과 장 가뱅 주연의 영화인데, 만기 출소한 알랭 들롱이 자신이 하지 않은 일로 억울하게 죄인으로 몰려요. 문을 두드리는 등 일련의 행동이 계획적으로 한 일이 아닌데 나중에 법정에 서니까 그런 행동들이 아귀가 맞아떨어져요. 그걸 보면서 ‘인간이 저렇게 합리적이고 논리적이지 않은데 단죄할 때는 인간을 100% 합리적인 존재라고 전제하는군. 저게 맞아?’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나도 마찬가지예요. 지금도 그래요. 정돈해서 거룩해 보이는 말을 해도 한편으로는 ‘어떻게 하면 좀 더 편안할까? 유리할까? 나를 덜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거든요. 어쩔 수 없이 인간은 자기 욕망에 충실한 존재예요. 그런데 큰 얘기를 하다 보면 사적인 욕망은 다 빼고 거룩한 얘기만 하게 된다는 거죠. 이건 거짓이에요.


⑥ 그럼에도 최인아라는 사람의 소명을 거론한다면.


“샘플론으로 말하고 싶어요. 나는 롤모델이 없었는데, 그 상황을 아쉬워하지 않고 오히려 즐겼어요. 내가 롤모델이 되고, 내가 샘플이 되자고. 회사 내에 만연한 남성 위주의 제도와 시스템은 한 번에 바뀌지 않아요. 사회가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이 그렇고 조직 운용 방식이 오랫동안 그렇게 되어왔으니까. 그럴 때 중요한 건 개인의 돌파력이에요. 어떤 개인 한 명이 정말 죽을힘을 다해 돌파하면서 샘플이 되면 ‘어? 저게 되네?’가 되는 겁니다. 최초라는 건 단지 두 번째나 세 번째보다 하나가 빠르다는 걸 의미하지 않아요. 그 최초의 샘플이 나오기 전까지는 불가능한 거예요. ‘저건 안 돼’ ‘길이 없어’ 하는 걸 되게 하고, 길을 만드는 최초의 사람이에요. 지도에 길이 없다면 그건 아직 만들지 않은 길이라는 뜻입니다. 아직 안 만들어서 없는 거예요. 누군가가 만들면 그 사람은 최초의 길을 낸 사람이 됩니다. 박세리 선수도 그렇죠. 박세리는 한국에서만 활동해도 충분히 괜찮은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LPGA에 도전했죠. 모두가 안 될 거라고 봤어요. ‘미국에 실력자가 얼마나 많은데 그게 되겠어?’ 했죠. 그런데 했어요. 이후 한국 여자 골프선수들이 줄줄이 세계를 제패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뭔가 안 되는 것을 되게 하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돌파해내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게 그 사람의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민의 세 줄 생각

강남으로 외근을 나갔다가 잠시 근처에 있는 최인아책방에 들렀습니다.

박준 시인의 산문집을 골라 값을 치르고 나오는데, 이곳은 쉴새없이 비즈니스가 돌아가는 테헤란로 속에 고요히 존재하는, 그래서  공간에,  사회에  필요한 작은 쉼터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간' 대한 고민을 점점  많이 하게 되는 시기, 쉰이 넘어서새로운 길을 개척해가며 사람들에게 좋은 롤모델이 되어가고 있는 최인아 님의 인터뷰를 보며 나의 소명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Photo by Karl Magnuso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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