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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남긴 열 살배기 그랜저

2. 태어날 때부터 아빠는 아니니까

by 자민

"차가 연식이 좀 됐네요."


엔진오일 교체한 지가 까마득해서 오일을 갈러 집 근처 정비소에 들렀더니, 정비사가 차에 이곳저곳 손볼 데가 많다고 친절히 일러줬다. 주행거리가 십만 킬로미터에 다다랐으니 타이밍벨트 세트도 바꿔야 하고, 오 년전쯤 바꾼 타이어도 편마모가 있어서 당장은 아니라도 날씨가 더 추워지기 전에 교체하는 게 좋겠다고 알려주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몰고 있는 차 나이가 만으로 딱 열 살이다. 2009년식이지만 실은 2008년 가을에 출고된 그랜저 TG. 아직 내 차라고 말하기엔 아버지의 손때가 훨씬 더 많이 묻어있는, 아버지가 남긴 유품 중에는 가장 쓸모 있는 녀석이다. 주말에 아이들을 데리고 야외로 나갈 때, 그리고 가끔 동생네나 처가로 멀리 나갈 때 큰 불편 없이 우리 가족을 실어다 준다.


아버지에게는 두 번째 자가용이었다. 십 년 넘게 타던 쏘나타가 사고 나서 폐차시킨 후, 출퇴근 목적 반 영업목적 반으로 새 차를 샀다. 당시 집안 형편을 생각하면 만만치 않은 가격이었음에도, 아버지는 쏘나타보다 좋은 차를 오래 타고 싶다며 무리해서 그랜저를 할부로 뽑았다. 카탈로그를 보면서 심혈을 기울여 색상과 옵션을 고를 땐 너무나 진지해서 '저 양반이 무슨 수능시험이라도 보고 있나' 싶을 정도였다.


차가 출고된 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내 기억이 맞다면, 할머니는 딱 한 번 이 차에 앉아보셨다. 할머니 영정사진을 모시고 조수석에 탔을 때, 운전석에 있던 아버지는 조금은 쓸쓸하면서도 먹먹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래도 네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차가 나와서 다행이다. 좋은 차를 운구차로 쓸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그랜저는 달리다, 한동안 멈춰 서다를 반복했다. 워낙 약주를 좋아했던 아버지였던지라, 그랜저는 아파트 주차장에 그냥 서 있을 때가 많았다. 만 십 년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주행거리 십만 킬로미터를 못 채운 이유다.


그래도 아버지는 그랜저 운전석에 앉아 있을 때 가장 행복하셨던 것 같다.


투병 중에도 아버지는 운전대를 잡았다. 집에서 병원까지 짧은 거리도 힘겨워했지만 그래도 꿋꿋이 엄마를 조수석에 태우고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해서 나오길 반복했다. 기력이 쇠하기 직전까지.


이 이야기를 나중에 듣고 아찔했으나, 아마 엄마도 차마 말리지 못하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운전석에 앉아 차를 운전할 때만큼은 병마의 속박에서 벗어나 어디로든 달릴 수 있는 자유를 느끼셨을 테니까.


주차장에 서 있는 좋은 차들을 보면 가끔씩 차를 바꿔볼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지만, 역시 쉽지 않다. 차에서 아버지 손때가 다 가실 때 즈음에야 겨우 다른 곳으로 보내줄 수 있지 않을까.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때까지는 정든 이 그랜저가 우리 가족의 튼튼한 발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이번에 이곳저곳 정비하고 나면, 다음 십만 킬로미터도 너끈하길 바란다. 공임까지 저렴하면 금상첨화일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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