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용기를 내어 한 발 앞으로
불현듯 과거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매개체들이 있다. 음악이 그렇고, 냄새가 또 그러하다.
어렸을 적 줄곧 들었던 아티스트의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어느덧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든다. 조용필과 나훈아 콘서트에 그렇게 많은 중장년층이 몰리는 것도, 김동률과 이적, 이소라 콘서트가 열린다고 하면 '이번에는 한 번...?'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다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그렇지만, 좀 더 본능적으로 과거를 소환하는 것은 냄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청각을 자극하는 음악도 물론 강력한 매개체이지만 그래도 음악은 그나마 합리적 이성이 약간이나마 작용하고 있는 느낌이다. 반면 후각을 자극하는 향기는 두뇌의 작용이 거의 없이 즉각적으로 과거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만든다. 시장 바닥에서의 생선 냄새가 그렇고, 제3국에서의 매캐한 매연 냄새가 그렇고, 명절날 고소한 전 부치는 냄새가 그렇다.
그런 차원에서, 인생에서 잊지 못할 냄새 중 하나는 복숭아 향기다. (냄새가 향기를 포괄하는 보다 넓은 의미의 단어라는 점에서 엄밀히 말하자면 둘은 다른 의미이고, 그렇게 따지자면 복숭아는 냄새보다는 향기에 가깝지 않은가 하는 개인적인 생각이다.) 마트에서, 혹은 거리에서 짙은 복숭아 향기를 맡는 순간, 그 향기는 초인종 누르는 것조차 힘겨웠던 작은 꼬꼬마 시절로 나를 데리고 간다.
할머니는 과일장수였다. 할아버지는 작은 복숭아밭을 일구는 농부였다. 할아버지가 복숭아를 거두면, 할머니는 그 복숭아들을 나무 궤짝에 담아 읍내에 나가 팔곤 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터를 잡고 살았던 그 동네, 즉 아버지의 고향 일대가 모두 복숭아 산지였기에, 주변 사람들과 크게 다를 것 없이 두 분도 그렇게 한평생을 살았다. 그런 조부모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내게 복숭아 향기는 여름의 초입이 이르렀음을 알리는 향기였고, 가을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9월까지 내내 익숙하게 달고 살아야 했던 냄새였다. 복숭아 밭에 가서 복숭아를 따는 할아버지와 함께 한나절을 지내고, 복숭아를 파는 할머니 옆자리에 앉아 이미 너무 짓물러 팔 수 없는 복숭아를 까먹으며 남은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덧 날이 서늘해지기 시작하면 복숭아 나뭇가지들을 주워 땔감으로 쓰던, 지금 생각해보면 참 잊지 못할 경험들을 했다.
그때는 하루하루 변함없이 계속될 것 같던 일상이었는데, 어느새 시간은 흘러 흘러 수십 년이 지났다. 그새 나의 유년기를 가득 품어주셨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그리고 잠시 자식을 맡기곤 정신없이 일하다 일요일에 잠시나마 아들을 들여다보고 갔던 젊은 아버지도 이제는 모두 떠나고 없다.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지금, 내가 맡는 복숭아 향기에는 사랑을 주고 먼저 떠나버린 사람들에 대한 아쉬움까지 두어 겹 덧대어져 있는 것 같다.
얼마 전 길을 걷다 과일 좌판을 지나는데 진한 복숭아 향기를 맡았다. 여름이구나... 싶던 순간, 의도한 건 아니지만 그 찰나 동안 수십 년 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다녀왔다. 쨍쨍 내리쬐는 뙤약볕 아래 땀을 뻘뻘 흘리며 복숭아를 따던 할아버지, 어떻게든 한 개라도 더 팔아보겠다며 손님과 실랑이를 하던 할머니, 그리고 어느 서늘하고 깜깜한 밤에 끼익 소리를 내며 대문을 열고 들어오던 아버지의 모습이 한 데 겹쳐지는 순간과 마주했다. 향기로서 나마 그 시절을 추억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젠 누구도 알 수 없는 나만의 기억이지만 그것들을 소환할 수 있는 매개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남프랑스 어느 마을에 가면 자신에게 맞는 향수를 맞춤식으로 만들어주는 가게들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책 '향수'의 모티브가 되기도 한 마을이란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를 가장 잘 표현해줄 수 있는 향'이란 과연 무엇일까 스스로 궁금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내가 가장 곁에 두고 싶은 향기를 만들고 싶다면, 한여름날 쨍쨍한 볕을 받고 자란 복숭아에서 나는 그 향기가 아닐까 싶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어 남프랑스의 그 마을을 방문한 일이 생기게 된다면, 나는 복숭아 향이 나는 향수를 만들어 달라고 청하고 싶다. 백도에서 나는 향은 황도보다는 약하지만, 그 나름의 은은한 향 그대로도 좋을 것 같다. 꼭 여름이 아니더라도 가끔씩 그 향수를 뿌리는 순간, 과거의 추억들이 지금의 나와 계속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상상과 함께.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가 그랬던 것처럼.
정신없이 일에 치이는 와중에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여름이다. 남프랑스까지는 너무 먼 길이니, 주말에 일단 동네 마트에 가야겠다. 가서 실해 보이는 복숭아나 한 가득 사서 아이들과 배불리 나눠 먹으며 새로운 추억들을 쌓아나가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