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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난 해운대 앞바다

3. 추억을 상속받다

by 자민

부산역까지는 정확히 두 시간 십 분이 걸렸다.


잠이 덜 깬 아이 둘을 데리고 정신없이 서울역으로 내달려 간신히 KTX를 탔다. 열차 안에서 칭얼대는 아이들을 달래며 아침을 먹이고 뽀로로와 유튜브 조합으로 간신히 두 시간을 버텼다. 이런 사태가 올 것임을 미리 예상하고 대전과 대구만 정차하는 급행 KTX를 예약했건만, 둘째가 빼액 소리 지르는 순간 느껴지는 주위 승객들의 따가운 눈총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이번 가을이 지나기 전에 꼭 부산에 가고 싶었다. 부산에 가서 친구들도 만나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그리고 아버지도 만나고 싶었다. 기차 속 난리통은 살짝 욕심을 부려 여행 일정을 잡은 대가이기도 하고, 수십 년 전 어린 내가 저질렀을 것이 분명한 난리통에 대한 대가이기도 했다.


내가 자란 대전은 내륙 한가운데에 있어서 바다 보기가 쉽지 않다. 지금이야 교통편이 좋아져서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었지만, 내비게이션 없던 예전에는 서해안만 가려고 해도 서너 시간은 족히 걸렸다. 90년대에 그랬으니, 그 전에는 더 말할 나위 없었겠지 싶다. 바다를 보러 가는 것은 놀이공원 나들이와 함께 장거리 여행의 범주에 속하는 사건이었다.


아버지와 부산에 처음 놀러 갔던 것은 30년 전, 1987년 가을이었다. 마흔 넘을 때까지 제주도도 못 가봤던 아버지에게 부산 여행은 아마 그 당시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먼 거리의 가족 여행이 아니었을까 싶다.


첫 여행의 기억은 사실 남아있는 게 없다. 해운대에서 내가 발가벗고 놀았구나 하는 사실은 집에 걸려있던 액자 속 사진을 통해 사후적으로 확인했던 것일 뿐,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나마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은 부산까지 가는 통일호 기차 속에서의 이미지다.


각진 초록색 의자에 네 식구가 모여 앉아 주황색 망 속에 들어있는 삶은 계란을 까먹고 있던 모습, 그리고 그 계란을 손에 들고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던 아버지.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한다고 생각하면 저절로 소환되는 가장 원초적 기억 중의 하나이다. 부산으로 가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음에도 굳이 이번 여행에 KTX를 고집했던 것은, 삼십 년 전 통일호 열차 속 기억에 대한 오마주였는지도 모르겠다.


아이 둘을 데리고 다니는 여행은 부모 입장에선 사실 여행이라기보다는 고행에 가깝다. 사진 속에서야 즐거운 모습으로 한가득이지만, 카메라 앵글 밖에서는 헬게이트(!)가 펼쳐진다. 그게 현실이고 일상임을 아이 키우는 부모들은 모두 말하지 않아도 그저 바라보면 온몸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만 이틀간 해운대를 중심으로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30년 전 두 아이를 데리고 부산으로 당일치기 여행을 온 30대의 아버지를 추억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주 6일 일하고도 모자라 일요일도 격주로 일하던 시절, 큰 마음먹고 부산까지 당일치기 여행을 감행했던 아버지 모습을 조용히 머릿속에 그렸다.


새벽같이 일어나 대전역에서 부산행 통일호를 탔던 아버지는 해운대와 태종대를 둘러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애들 데리고 다니느라 몸은 힘들지만, 이렇게 아등바등 복닥복닥 지내는 게 세상살이고 그 속에서 오래도록 잊지 못할 기억 하나 건져서 그저 좋았다 이런 생각 하지 않으셨을까 혼자 넌지시 생각해본다.


해운대 앞에 가서 30년 전 나와 내 동생이 나온 사진 그대로 두 아이들의 사진을 찍었다. 그새 해운대 풍경도 많이 바뀌었다. 시간은 흐르고, 옛사람은 가고, 새로운 세대는 자란다. 30년 전 부산 여행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 이 아이들에게도 다소 정신없던 이번 여행 어느 한 자락이나마 나중에라도 오래 곱씹을 만한 좋은 추억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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