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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민 Aug 17. 2022

들어는 봤는가 떡볶이 외교

다른 문화권 친구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노력

본격적인 첫 학기가 시작되고 나서도 정신 못 차리는 순간들이 계속되었다.


듀크 MBA 2년 과정의 학제는 모두 2년 8학기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니까 보통 생각하는 한 학기가 두 개로 나뉘어 있다고 보면 이해가 편하다. 미국의 명절인 추수감사절을 사이에 두고 가을 1학기와 가을 2학기가 나뉘고, 두 개의 학기가 끝나면 크리스마스 연휴를 맞는다. 새해의 끝과 시작을 연휴와 함께 보내고 나면 봄 1학기와 봄 2학기가 이어진다. 각 학기는 6~7주 정도 간격으로 구성되어 있고, 한 학기 동안 4-5개의 강의를 수강한다.


대부분의 MBA 과정들이 그렇겠지만, 1학년은 체력과 정신 양면에서 힘든 시기다. 특히 외국인 학생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본국의 사회문화와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수업도 따라가야 하고, 동시에 취업 준비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많은 경영대학원들은 학생들을 다양한 환경에 노출시키고, 서로 친밀감을 형성하여 의지할 수 있도록 6-7명의 팀을 구성하여 첫 학기 혹은 1년간 고정된 커리큘럼을 수강하도록 유도한다.


나 역시 섹션 1에 소속된 직후 팀이 세팅되었다. 미국 출신 세 명, 남미 출신이 한 명, 중국 출신 한 명, 그리고 나 이렇게 여섯 명이 한 팀이 되어 가을 학기 동안 같은 수업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수업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나는 팀원들은 물론, 같은 섹션 동기들과 쉽게 친해지지 못했다. 무엇보다 언어가 문제였다. 간신히 어찌어찌 턱걸이로 입학은 했지만,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동기들과 온전히 의사소통을 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수업에 들어갈 때마다 매번 '오늘은  콜드 (강제 지명) 당하지 말고 자발적으로 발표해야지'하는 마음을 먹었지만, 그러지 못할 때가  많았다. 학교에 가면 본의 아니게 과묵해졌다. 본디 활달한 성격이 아닌데 언어적인 상황이 겹쳐지니 점점 학교 동기들 사이에서는 '전형적으로 과묵한 아시안 남학생'이라는 스테레오 타입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남은 기간을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뭔가 반전이 필요했다. 나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가을 학기가 끝나는 날, 내가 포함되어 있는 팀원들을 가족 포함해서 모두를 집으로 초대했다. 그리고 아내오 함께 있는 실력 없는 실력을 총동원하여 식탁 가득 한국 음식을 차려냈다. 떡볶이, 잡채, 불고기, 제육볶음, 갈비, 동그랑땡, 비빔밥... 나름의 음식 외교, Food Diplomacy였다.


역시 마음을 통하는 가장 빠른 길은 같은 음식을 먹는 , 식구가 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효과는 괜찮았다. 솔직히 기대 이상이었다. 무엇보다 한국 음식을 앞에 두고 대화를 하다 보니 그동안은 자연스레 한국, Korea 대화의 주제가 되었다. 학교생활과 관련된 다른 주제들로 이야기가 이어졌다가도,  다시 한국으로 대화의 주제가 돌아오곤 했다. 한식이  세계에 많이 알려졌다고는 하나, 상대적인 차이는 여전히 존재한다. 미국에서도 다양한 지역에서  친구들인지라, 모든 한식이 친근한  아니었다. 음식의 유래와 조리법 등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금세 시간이 훌쩍 지났다. 학교 프로젝트룸에서 수업 준비를 하며 복잡 미묘한 신경전을 하던 친구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지속됐다.


음식 외교의 효과(?)를 확인한 후에는 MBA가 마무리되는 순간까지 이 수단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하루는 중국 친구들, 다른 하루는 일본 친구들, 또 그다음 주는 동아시아 문화에 관심 있는 미국 친구들, 그다음에는 러시아와 태국 친구들... 이런 식으로 여러 그룹을 순차적으로, 반복적으로 집으로 초대하여 한국 음식을 대접하며 학교 수업시간에는 다소 부족했던 네트워킹을 만회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었다. 그리고 덩달아 내 한식 조리 역량도 유학 초기에 비해 일취월장하는 부수적인 효과도 얻을 수 있었다. 아주 훌륭한 맛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국에서는 직접 해 먹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하던 탕수육과 갈비찜, 감자탕을 무리 없이 제 시간 내에 만들어 내놓을 정도는 되었다.


집에서 불 피우기 너무 덥고 힘든 여름에는 근처의 한식당을 이용하기도 했다. 다행히 내가 공부하던 2016-2017년 즈음에는 강남스타일 이후 미국에도 점차 확산되던 K-컬처의 탓이었는지 노스캐롤라이나 더럼에도 그나마 괜찮은 식당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바로 집 근처는 아니었지만 옆 도시인 롤리 쪽으로 조금 나가면 '서울 가든'이 있었고, 학교와 맞닿아 있는 더럼 시내에도 퓨전 한식을 맛볼 수 있는 식당이 생겨났다. 팁을 포함하면 가격은 조금 셌지만, 집으로 초대할 경우 드는 재료비 등을 고려하면 오히려 경제적인 면도 있었다.


5년이 지난 지금 그때를 떠올려보면, 학교에서 나눴던 대화들만큼이나 우리 집에서 음식을 나누며 나눈 대화들이 많이 기억 속에 남아있다. 절대적인 시간을 비교하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은 횟수였음에도 그 저녁 자리들이 여전히 또렷한 형태로 머릿속에 적잖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음식이, 음식이 들어간 후의 뱃속 느낌이 서로 다른 국적과 문화를 가진 채 살아온 존재들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한 마음의 벽을 서서히 무너뜨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MBA를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온 후부터 코로나 발생 전까지, 적어도 몇 달에 한 번씩은 한국에 출장차 들른 외국 동기들이 연락을 해오곤 했다. 잊지 않고 연락을 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정 불가피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흔쾌히 만났다. 공교롭게도 한국을 찾은 동기들 대부분은 같이 공부하는 동안 우리 집에 와서 한식 맛을 본 친구들이었다.


K-food의 수도 서울에서 다시 만나 소고기집, 치킨집, 심지어 비건 레스토랑까지 넘나들며 나는 한편으로는 뿌듯하고, 또 한편으로는 혼자 부끄러웠다. 내가 이 친구들한테 한식을 좀 더 친근하게 만들어줬구나 적어도 서울을 방문하는데 0.001% 정도의 영향은 미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 슬쩍 뿌듯해졌고, 음식 실력 형편없던 그 시절 내 요리의 실험 대상이 흔쾌히 되어준 줄은 까맣게 모르고 내 앞에서 웃는 친구들을 보면 살짝 속으로 부끄럽고 민망해졌다.


코로나로 인한 팬데믹도 걷히고, 하늘길도 점차 정상화되고 있으니 조만간 다시 한국을 찾는 동기들이 예전처럼 연락을 해오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어느 날 갑자기 그런 연락을 받게 되면, 예전보다 두 배는 기쁠 것 같다. 그날을 기다리며, 서울의 맛집 리스트를 오늘도 업데이트해본다. 언제라도 자신 있게 다음과 같은 말을 턱 내뱉을 수 있도록.


"어서 와 서울은 처음이지? 오늘 밤엔 내가 만든 변변찮은 한식이 아닌, 진짜 최고의 K-food를 맘껏 즐겨보자고!"


* Photo by Marcin Skalij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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