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민 Aug 12. 2022

가면 증후군을 겪다

안으로 자꾸만 작아지던 시기가 있었다

미국에 도착한 첫 달은 이런저런 정착 준비로 인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앞으로 2년간 살아야 할 집도 구해야 하고, 타고 다닐 차도 알아봐야 했다. 뉴욕 등 일부 도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비슷하겠지만, 듀크대가 위치해 있는 더럼 시도 학교 근처 일부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차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했다. 


첫 한 달간 해결해야 했던 가장 큰 미션은 운전면허증 취득이었다. 한국에서 취득해 온 국제 운전면허증으로는 한 달 이상 운전이 불가능했다. 안타깝게도 노스캐롤라이나 주는 한국 운전면허증을 인정해주지 않는 주였으므로, 면허시험에 응시해야만 했다. 주민등록제도가 없어 운전면허증이 사실상 신분증 역할을 하는 미국에서는 신원 증명의 편의를 위해서라도 얼른 합격해야 했다. 


인터내셔널 학생들을 위한 오리엔테이션이 끝나자마자 나를 포함, 몇 명이 우르르 DMV(Department for Motor Vehicle)로 향했다. DMV는 운전면허시험 및 면허 발급을 주관하는 공공기관으로, 늦은 일처리로 악명이 높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주토피아'에서도 느릿느릿한 나무늘보 캐릭터로 DMV 직원들을 등장시켜 개그 소재로 삼은 바 있다.) 


나름 지역에서 발급을 잘해준다는 DMV를 굳이 찾아서 갔는데, 어이없게도 필기시험에서 한 문제 차이로 똑 떨어지고 말았다. 유유히 주행시험을 보러 가는 동기들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운전 경력이 몇 년인데 설마... 하고 너무 자만했던 영향이었다. 


한 번 시험에 떨어지면 꼼짝없이 다음 주까지 한 주를 보내야 했다. 절치부심 한 주를 보내고 맞은 주말, 다시 DMV에 가서 시험을 보고 이번엔 필기시험을 여유 있게 통과했다. 다음은 실기 주행. 면접관과 함께 내가 몰고 온 차량을 향해 나섰다. (노스캐롤라이나에서는 자신이 타고 온 차량으로 주행 시험을 봐야 한다.) 


결과는? 불합격. 외국인 면접관을 옆자리에 태우고, 초행길을 가는데 지나치게 긴장했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멈출 때 멈추지 못하고, 주변을 살펴야 할 때 살피지 못했다. 두 번째 주에도 면허증을 쥐지 못한 채 DMV를 나설 때의 무거운 마음이란. 


그다음 주, 이제는 그것도 경험이 쌓였다고 여유 있게 오전 일찍 나와 DMV 앞에 줄을 섰다. 시험 신청을 하고, 지난주처럼 면접관과 함께 주행 시험에 나갔다. 그리고 또 불합격. 이번엔 내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겠는데, 면접관은 차가운 표정으로 불합격을 주고 차에서 내려 사라졌다. 자괴감마저 들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수많은 시험을 뚫고 MBA까지 왔는데, 생존하기 위해 필수 자격인 운전면허조차 못 따고 있었다. 나, 과연 여기서 공부할 자격이 있는 건가? 


세 번을 연거푸 떨어졌다는 소식이 그새 동기들에게 퍼져나가서, 학교 복도에서 만나는 친구들마다 걱정 아닌 걱정을 해주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의 다른 동기들은 오리엔테이션 후 첫날 두어 시간 만에 바로 필기와 주행을 모두 통과, 가볍게 이 생존 미션을 마무리했기 때문이다. '아니 이 쉬운 걸 왜...?'라는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미국에 온 지 한 달째 되던 주말, 네 번째 시도에 나섰다. 지난 주와는 다른 면접관이었고, 그와 함께 별다른 대화 없이 미리 숙지해 둔 절차에 따라 기계적으로 주행에 나섰다. 그러고 나서 다시 DMV로 돌아왔다. 면접관은 물끄러미 결과표를 보다 다시 나를 바라보고 물어봤다. 


"너, 오늘 운전 어땠다고 생각해?"

"... 난 오늘, 정말, 내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


아마 그 순간 내 눈빛은 슈렉에 나오는 장화 신은 고양이 같지 않았을까. '제발...'이라고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더 이상 무너질 자존감도 없었다. 그리고 그날, 나는 빛나는 임시면허증을 안고 집에 돌아왔다. 4수 끝에. 


살면서 가장 어려웠던 시험이었다. 


무엇보다 마음이 어려웠다. 가족과 떨어져 혼자 난생처음 살아보는 외국이었다. 가구도 변변찮고, 영어도 변변찮았다. 그 와중에 이런저런 준비라도 수월했다면 그나마 덜했을 텐데, 운전면허시험에 한 달을 허비하니 나 스스로에게 자꾸 되묻게 되었다. 과연 나, MBA를 무사히 마칠 수는 있는 것일까? 사실 내 본 실력은 보잘것없는데, 요행에 요행이 겹쳐 여기까지 온 게 아닐까? 학교에서는 강의를 온전히 알아듣지 못해 답답하고, 학교 밖에서는 운전면허 시험을 포함한 각종 생계유지 활동에 온 정신을 뺏겼던 한 달이었다. 


한참 지나고 나서야, 그 당시에 느꼈던 좌절감과 무력감을 '가면 증후군'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았다. 가면 증후군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자신의 성공이 노력이 아니라 순전히 운으로 이뤄졌다 생각하고, 지금껏 주변 사람들을 속여왔다고 생각하면서 불안해하는 심리 혹은 증상.' 


남들은 한나절만에 쉽게 통과하는 운전면허 시험에 거푸 떨어지면서, 내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다른 학교 MBA에 다니던 한국인 학생 중에 결국 과정을 이수하지 못하고 중도에 한국으로 귀국한 사람도 있다는 이야기가 귀에 쏙쏙 박혀왔다. 


'앞으로 2년, 잘 해낼 수 있는 걸까...?'




천신만고(?) 끝에 운전면허를 따고 차를 장만해서 학교 통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사이 인터내셔널 학생들을 위한 사전 프로그램이 끝나고 이제 영미권 (그러니까 미국과 캐나다) 동기생들과 같이 수업을 들을 때가 된 거다. 제2외국어로 영어를 쓰는 친구들과의 소통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모국어로서 영어를 쓰는 친구들과 같이 수업을 들으면 얼마나 또 힘들까... 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절로 한숨이 나왔다. (7년이 지나고 다시 돌이켜봐도 기운 없던 시절이다.)


학교는 400명이 넘는 전체 클래스 인원을 6개 섹션으로 나누었다. 나는 섹션 1이었는데, 대략 70명 수준이었다. 첫날 강의실에 모여 한 명씩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듀크는 물론 스탠퍼드, 예일... 쟁쟁한 대학 출신에 이름을 대면 모두가 알 법한 글로벌 기업들에서 직무 경험을 쌓은, 앞으로 2년간 같이 생활할 동기들을 보며 나는 한 뼘 더 움츠러들었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그 와중에 학교는 정신없이 프로그램을 돌리고 있었다. 섹션이 정해지자 마자 바로 '팀워크 형성'을 위한 야외, 아웃도어 활동에 나갔다. 아니 분명히 경영학 공부를 하러 왔는데 웬 유격훈련? 웬 해비탯 자원봉사? 


듀크 MBA가 추구하는 중요한 가치가 '팀워크'이니만큼, 이러한 프로그램은 처음 만나는 재학생들 간에 존재하는 서먹함을 허물고, 팀워크라는 소프트 스킬을 증진하려고 하는 것임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창 일하다 서른 중반에 다시 학교로 돌아온 입장에서, 이론과 실제는 아무래도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아는 나이였다. 일말의 귀찮음도 없었다고 하면 거짓이다. 


그런데, 그날 아웃도어 프로그램 중에 고공에서 외줄 타기를 하는 코스가 있었다. 아래에 그물이 있어 추락해도 다칠 위험은 없었지만, 그래도 추락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 유쾌하지 않은 높이였다. 외줄 위에서 대한민국 육군 예비역 병장의 위신을 모두 깎아내리며 추락하려는 찰나, 옆에 있던 미국 여자 동기 매디가 나를 잡아챘다. 


"JM, Are you okay?"


매디가 떨어지기 직전에 나를 잡아준 덕분에 나는 추락의 굴욕(?)을 겪지 않은 채 무사히 지상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돌이켜보니 아마도 그때였던 것 같다. 바닥을 쳤던 자존감이 조금씩 반등하기 시작했던 시점이. 뭐 영어 좀 못하면 어떤가. 외국인이 영어를 원어민처럼 하는 게 사실 더 이상한 거지. 뭐 좀 실수하면 어때. 실수하더라도 내 옆에 동료가 나를 잡아줄 거야. 그런 안정감을 느꼈던 첫 경험. 학교가 그런 부분까지 미리 세심하게 계획하지는 않았겠지만, 확실히 그때 그 프로그램은 본격적으로 MBA 가을학기가 시작되기 전, 앞으로 내게 닥칠 일들에 대해 조금은 편하게 생각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했다.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이곳에 오기까지 해왔던 나름의 노력에 대해 긍정할 수 있게 만든 순간이었다. 


어려울 때(?) 손을 내밀어 준 매디는 이후 2년 내내 든든한 친구가 되어 주었다. 7년이 지난 지금에도 아직까지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는 좋은 벗으로 곁에 남아 있다. 


* Photo by Yosi Prihantoro on Unsplash

이전 02화 노스캐롤라이나가 어디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