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추억을 상속받다
호텔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로맨스 드라마 <남자친구>를 보다가 10년도 훌쩍 넘은 옛날 일 하나가 떠올랐다. 그렇다고 물론 로맨스 비스무리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려는 건 아니다. (남들은 잘 모르는 것 같지만, 다른 건 몰라도 주제 파악만은 잘하는 편이다.)
학부 졸업을 앞두고 모 그룹의 공채 신입사원으로 합격했다. 지금도 여전히 그러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때는 입사가 확정되면 부모님들을 모셔다 회사를 구경시켜 주고 나서 그룹 산하의 호텔에서 하룻밤을 재워줬다. 돌이켜보면 타 회사로 이탈 가능성이 있는 신입들을 붙잡아두려는 인사부서의 정책이었겠지만, 당신 자녀들이 이렇게 좋은 회사에 다니게 되었으니 걱정 마시라는 차원의 인간적 배려도 섞여 있었을 것이다.
여튼 그런 연유로 부모님이 서울로 상경하여 본사 건물을 둘러본 후 워커힐 호텔에서 숙박을 하시게 되었다. 굳이 확인해볼 것도 없이, 두 분 모두 생전 처음으로 5성급 호텔에서 잠을 자는 첫날이었다. 부모에게 폼 잡게 해 주니 신입사원 어깨가 으쓱할 것은 당연지사였고, 그 효과가 톡톡히 있었는지 나는 그때 이후로 이직 한번 못해본 채 여전히 부모님이 구경 오셨던 건물을 오르내리고 있다.
그날, 신입사원 장기자랑과 저녁식사를 동반한 전체 행사를 마치고 부모님을 객실로 안내해드렸다. 방에 들어가시자마자 이런 데 엄청 비싼 곳 아니냐며 침구를 손으로 쓸어보고 미니바를 열었다 닫았다 하던 어머니와 아버지 모습이 아직도 어젯일처럼 기억이 난다.
부모님도 방에 모셔다 드렸겠다, 아직 입사 전이지만 중요한(?) 이벤트도 하나 끝냈겠다 하여 살짝 풀어진 마음으로 동기들과 부어라 마셔라 하며 밤을 보냈다. 창 밖으론 눈발이 많이 날렸는데, 취기가 올랐던지 이런 날에 썩 잘 어울리는 꽤 멋진 눈이라는 나름 감상적인 생각이 살짝 스치기도 했다.
다음날 아침, 호텔이 지낼 만하셨는지 여쭤보는데 느닷없이 어머니가 아버지 흉을 보는 게 아닌가.
눈이 펑펑 내리던 그 밤에, 아버지가 배가 고프다며 워커힐 그 언덕길을 걸어내려가 한참 아랫동네까지 가서 치킨을 사 오셨단다. 룸서비스는 아마 감히 부를 생각조차도 못하셨을 게다. 첫 경험이란 늘 그렇듯 어딘가 정신없는 것이니.
한참을 지나 올라오는 길에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치킨을 어쨌든 두 분이 한밤중 호텔방에서 맛있게 드시고 주무셨다는 나름 훈훈한(!) 이야기를 듣는 내내, 내가 동기들과 어울리는 동안 그저 그런 해프닝이 있었구나 하고 어이없어하며 웃어넘겼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눈 내리던 날의 어둑어둑한 밤공기가 마음속에 오래도록 맺혀 있다. 분명 직접 눈으로 본 것은 주황빛 조명에 반사되어 내리는 눈발뿐인데, 이미 수십 번은 상상하는 와중에 마치 오래된 그림처럼 인이 박혀버린 광경이 머릿속에 남아버렸다. 가로등 아래 눈을 맞으며 소복하게 쌓여있는 눈길을 조심조심 느릿느릿 내려가는 아버지의 뒷모습.
왜 그 장면이 그날 마치 내가 제 눈으로 본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는지 이유는 모른다. 굳이, 애써 해석하자면, 아마도 그 모습이야말로 내 아버지를 가장 잘 압축적으로 설명하는 상황극 같았기 때문이랄까. 특급호텔 같은 럭셔리와는 영 거리가 멀었던 사람, 가끔은 좀 엉뚱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었던 사람, 무엇보다 소주 한 잔에 치킨 한 조각을 사랑했던 사람이 낯선 상황 속에서 만들어 낸 짧은 단막극. 배우를 오래도록 보아와서 그의 개성을 너무나 잘 아는 한 사람에게만큼은 기억에 남을 명장면을 남겨 준, 소소하고 밋밋하지만 조금은 황당한 이야기.
‘남주’인 박보검이 과일 가게를 하는 부모님을 호텔로 모시는 장면을 보다가 그만 떠올려버리고 말았다. 머릿속에 고이 접어둔, 아차산 근처 갈 때나 슬쩍 펼쳐보곤 하는 내 마음속 그림 한 폭을 다른 이들에게 몰래 들킨 것 같아 드라마를 보다 혼자 괜히 멋쩍어졌다.
아직 겨울이 다 지나지 않았으니, 주말에 그랜저 몰고 아차산이나 한 번 다녀와야겠다. 이제는 비스타로 이름을 바꾼, 그 호텔 앞을 좀 거닐어 봐야겠다. 마침 눈 오는 날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