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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 로봇의 시대를 기다리며

2. 태어날 때부터 아빠는 아니니까

by 자민

"비싸도 몇 백만 원이면 된대요, 글쎄!"


엑셀 시트를 들여다보는 게 업무의 상당량을 차지하다 보니, 낮에는 숫자가 눈을 거쳐 머리로 오는 동안 다른 의미 없이 그저 숫자로만 입력될 때가 있다. 아홉 자리에 쉼표 두 개는 억대의 금액. 거기에 쉼표 하나가 더해지면 천 억대... 그런 숫자들이 오가는 와중에 만나게 되는 백만 원은 자릿 수가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참으로 소소한 숫자다. 평소 같으면 일하는 동안 무심코 지나쳤을 몇 백이라는 숫자가 몹시도 불편하게 느껴졌던 건, 그 숫자가 내 마음속 어떤 기억과 조우해버렸기 때문이리라.


빌딩에 달려 있는 간판을 다는 비용이 고작 몇십, 정말 비싸야 몇 백만 원이라고 한다. 정확한 금액이야 건물별로, 위치별로 상이하겠으나 그 비용이 끊어 읽기 자릿수를 훌쩍 뛰어넘을 리는 없을 터, 숫자를 세는 쉼표의 개수는 감히 두 자리를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2019년, 원더키디의 시대를 목전에 둔 이 시점에도 이 일의 가치는 여전히 이 정도구나 싶어 순간 서글픈 마음이 울컥 올라왔다.


아버지는 간판장이였다. 평생을 뺑끼, 그러니까 페인트와 같이 살았다. 손수 페인트로 한 자 한 자 가게 간판을 써내려 가던 기능공. 모든 것이 디지털로 대체된 현재보단, 일상이 아날로그였던 과거에 더 빛났던 직업.


언제부터 그 일을 하시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어렸을 적 보았던 아버지의 글씨는 꽤나 멋졌다. 가계의 살림과 직결되었기 때문이었기 때문이었겠지만 당신은 잠들기 전에도 머리맡에 공책을 두고 붓펜으로 작은 글씨를 연습하곤 했다. 80년대 말, 할아버지 회갑연 때 써서 걸었던 만수무강 글씨는 아버지 인생의 정점을 보여주는 예술작품이나 진배없었다. 좀 더 멋들어진 간판은 아크릴이나 네온사인을 소재로 썼다. 아버지는 회사에서 쓰다 남은 아크릴 조각을 가져와 연필꽂이 같은 것도 뚝딱뚝딱 만들어주시곤 했다. 그럴 때면 맥가이버가 따로 없었다. 마침 그땐 나름 장발이시기도 했고.


페인트로 간판을 써 내려가던 시대는 PC가 보편화되는 90년대를 맞으며 이미 수명을 다했지만, 그 이후에도 아버지는 강산이 두 번 변하도록, 암 진단을 받고 나서 평생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게 될 때까지 그 업계를 떠나지 못하고 맴돌았다. 아주 떠날 기회가 한 번은 있었다. 내가 갓 세 살 정도 되었을 무렵, 지금의 나보다 훨씬 젊었던 그는 빌딩 위 간판 설치 작업을 하다 추락해서 뇌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대전에서 치료를 못해 서울까지 올라왔고, 수술 후에도 한 달은 족히 병원에 누워 계셨다. "다 나았어. 말짱해~" 하며 가끔은 훈장처럼, 머리숱을 들어 올리곤 한 바퀴 빙 두른 흉터 자국을 보여주시기도 했다.


한 때 네 가족의 생활을 꾸려나갈 만큼의 밥벌이는 해줬던 간판장이라는 직업은, 업종을 둘러싼 기술이 발전하면서 어느새 상대적으로 낮은 부가가치를 가진 일로 자리바꿈 했다. 업의 가치가 낮아졌으므로, 젊은 날 한때 장인에 가까웠던 아버지는 점차 경험은 있지만 육체노동에 가까운 시공 현장에서는 더 기여하기 어려운 그저 그런 관리자가 되어갔다. 진부한 레토릭이 아니라 진짜 죽음의 고비를 간신히 넘기고 버틴 일터였지만, 나이 든 노동자에게 그곳은 더없이 매정한 공간이었다. 아버지의 월급봉투 두께는 나이 듦에 비례하지 못했고, 켜켜이 쌓인 경험치를 쉬이 따라잡지 못했다.



쿠바 아바나 한복판 길거리를 걷다가, 건물에 매달려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만났다. 바쁠 일 없는 여행자였으므로, 기둥에 기대어 오래도록 그 사람들이 그네처럼 줄을 타고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봤다. 햇살 따가운 아침 일찍부터 대롱대롱 거미처럼 매달려 페인트칠을 하고 있는 이국의 노동자들을 보며, 난 한 사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30년 전도 전에 나를 떠나버릴 수도 있었던 사람. 그 무서웠을 어둑한 밤, 그가 조금이라도 더 생에 대한 의지를 붙잡고 있지 않았다면 나의 젊은 시절은 어떻게 변해버렸을까 생각하며.


얼마 전, 커피를 내려주는 로봇이 곧 확산되기 시작할 것이라는 기사를 봤다. 바리스타에 비해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커피를 내려 줄 수 있는 로봇이 곧 보편화될지도 모른단다.


커피 로봇보다는 간판 다는 로봇이 먼저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인공지능과 로봇의 시대라지만, 적용할 순서를 정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 만든 사회일텐데.


자본주의 세계에서 기술은 단위 시간당 더 많은 부가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영역부터 침투하기 마련이고, 위험은 상존하지만 여전히 부가가치가 낮은 공정은 기술의 혜택으로부터 꽤나 오래도록 소외되어 있을 것이다. 사람의 가치를 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회적 공감대를 이루고, 그럼으로써 로봇은 위험에 빠진 사람을 모른 척해서는 안된다는 로봇의 제1원칙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사회는 언제쯤 오게 될까. 한 사람의 가치도 감히 따질 수 없는데, 로봇이 투입되어 미리 막을 수 있는 잠재적인 인명 사고의 사회적 가치는 과연 얼마의 쉼표를 가진 숫자로 치환해야 할지 가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시트에 적혀있지 않은 숫자도 세상엔 얼마든지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실은 정확히 계량화되기 어려운 그 숫자가 실은 더 중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적어도 사람들이 잊고 살진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야 차마 말을 꺼내기 어려울 정도로 가슴 아픈 사고들을 뉴스에서 덜 보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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