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용기를 내어 한 발 앞으로
설이 코앞이다. 연휴 첫날, 새벽같이 일어나 봉안당에 들렀다가 처가로 향할 것이다. 지난 2년간 세 번의 명절을 겪으며 나름 최적화시킨 코스로 길을 나설 것이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그래 왔던 것마냥.
친척 어르신들과 함께 만나기로 한 시간에 닿으려면 일찍 일어나야 한다. 애들이 명절이라고 봐주고 그런 것 없기 때문에, 채비해서 나가려면 평소보다 더 부지런하게 움직여야 겨우 약속한 시간에 맞춰 세종에 닿을 수 있다.
또 지각해서 삼촌들에게 괜히 눈총 받지 말라고 그랬는지, 꿈에 아버지가 나왔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생기 있는 얼굴.
항암치료를 받던 시절의 모습이 아니었다. 조금은 장발에 가까운 희끗한 머리가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많아야 쉰 전후의 모습일까. 편의점인지 포장마차인지 모를 플라스틱 테이블에 걸터앉아 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특유의 추임새를 넣어 이야기하시는 걸 보니, 이 분, 우리 아버지가 맞다.
같이 이야기를 나누던 그곳이 제주 어딘가였던 것 같기도 한데 글을 쓰는 지금은 잘 모르겠다. 당신이 나름 심각하게 고민하며 내게 풀어놓던 문제도 이제는 정확히 뭔지 잘 모르겠다. 꿈이라는 게 깨고 나면 금세 흐려지기 마련이니 그러려니 한다. 아마도 아버지의 문제라기보다는, 지금 내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의 발현이었으리라.
그런데, 대화 내내 조용히 잠자코 있던 내가 마지막에 내뱉은 이야기만은 또렷이 남아있다.
"아빠, 오래오래 사실 거예요. 정말 다행이에요. 미리 저한테 털어놓으셔서."
그 말을 듣고 있는 아버지는 싱긋 웃고 있었다. 나도 함께 웃었다. 너무 좋았다. 나, 아버지랑 꽤나 오래 이렇게 지낼 수 있겠구나. 이게 현실이어서 너무 다행이구나. 내가 그동안 긴 꿈을 꾸고 있었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에 잠에서 깼다. 새벽녘 집은 어둑했고, 고요했다. 다시, 이 현실을 마주했다. 다 적응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마음속 깊은 곳까지 그렇진 않구나 하고 이야기해주는 꿈.
찰나였지만, 그래도 좋다. 생기 있는 아버지 모습을 오랜만에 이렇게라도 만날 수 있어서. 매일 누군가의 얼굴을 만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다시 알려주는, 그런 아버지가 설을 맞아 잠깐이라도 찾아와 줘서.
더 잠을 청하긴 글렀고, 음악과 함께 동이 터오길 기다린다. 다시 아침이 되면, 아이들의 아버지로서 열심히 운전해서 내려가야 하니까. 휴게소에서 타요 자동차도 태워주고, 같이 공룡 뽑기도 할 수 있도록 천 원짜리도 미리 몇 장 준비해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