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II - 가을
한 입 무는 순간 느껴지는 물컹한 식감, 곧이어 꾸덕꾸덕 올라오는 비릿한 살내음. 생선회는 콜라와 피자로 요약되는 어린애 입맛과는 대척점에 있던, 도무지 적응하기 어려운 음식이었다.
그런 회를, 아버지는 그야말로 사랑했다. 회 한 접시에 소주만 있으면 온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얼굴이었다. 아버지는 친구들과의 계모임에는 잘 나가지 않는 편이었는데, 횟집에서 하는 모임만큼은 자식들을 데리고 나가곤 했다. 회 한 점을 초고추장에 찍어 소주와 함께 털어 넣고는 짐짓 심각한 얼굴로 친구분들과 세상 걱정을 하던 아버지 옆에서, 풋콩만 한 움큼 까먹다가 잠들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월급봉투가 얇을 땐 집 앞 트럭에서 오징어회를 사왔다. 좋은 일이 있을 땐 광어회를 떠왔다. 1990년대 말, 동해안으로 가족여행을 나섰을 땐 중간에 차를 멈추곤 난생처음 보는 꽁치회를 비닐봉지 한가득 사서 차에 실었다. 볼품없는 운동복 행색에 비해 너무나도 밝게 빛나는, 흐뭇함이 가득했던 얼굴. 지금 생각해보면 <노인과 바다>에서 사투 끝에 청새치를 잡은 노인처럼 득의양양한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어떤 취향을 가진 존재였을까.
'취향'이라는 키워드에 빠져 살았던 작년과 올해, '나'라는 사람을 다른 이와 차별화하는 요소가 과연 무엇일까에 대해 자주 곱씹어봤다. 결국 좋아하는 음식과 옷, 즐겨 보는 것과 읽는 것, 자주 듣는 것과 타는 것, 그 모든 '것'들의 합이 취향을 이룰텐데, 그중에서도 먹고 마시는 것은 그 사람의 정체를 드러내는 가장 원초적인 취향이 아닌가.
그러고 보면, 나와는 참 많이 다른 아버지였다. 중간에 변절한(?)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피자와 햄버거는 끝까지 질색했다. 삼겹살은 주머니 사정이 괜찮을 때 가장 많이 사랑받은 메뉴였다. 할머니가 직접 담근 고추장은 벌이가 시원찮을 때 끝까지 남아 버텨준, 아버지의 마지막 보루였다.
그런 아버지에게 '회'는, 그나마 허용된 최대한의 사치를 상징하는 음식이 아니었을까. 자주 먹을 순 없지만, 아내에게 혼날 땐 혼나더라도 소주 한 잔의 취기를 빌려 까짓 거 호기롭게 지갑을 열어 사먹을 수 있는. 그래 봤자 고급 횟감이 아닌 광어나 우럭이었지만, 아버지에겐 소울푸드 아니었나 싶다.
음식 취향이라는 게 참 묘해서, 처음에는 질색하다가도 어느 순간 맛을 알게 되면 빠져나올 수 없게 되기도 한다. 김치가 그렇고, 청국장이 그렇고, 회가 또 그렇다. 풋콩만 까먹던 시절을 지나 아버지와 함께 회를 먹게 되고, 회 맛을 알게 되었다. 나중에는 회를 즐기는 수준에 이르렀지만, 그땐 이미 아버지보단 다른 친구들과 술자리를 갖는 게 익숙해진 나이가 되어 아버지와 회를 놓고 먹은 기억은 오히려 어릴 때보다도 적다.
얼마 전 아내 생일 케이크를 고르다가, 기가 막힌 케이크를 온라인에서 발견했다. 한 스타트업에서 회를 떠서 케이크 모양으로 만든 '회이크'를 팔고 있는 게 아닌가. 재기 넘치는 아이디어에 감탄하며 즉시 주문 버튼을 눌렀다. 순간 아버지 생각이 났다. 야, 이건 아버지 생신 때 주문해두면 두고두고 칭찬받을 케이크, 아니 회이크인데... 회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축하의 의미를 두 배로 전할 수 있는, 속임수(fake)가 아닌 진짜배기일 텐데. 속절없이 입맛만 다셨다.
그날 밤, 연어와 광어로 모양을 낸 회이크는 가족들의 즐거운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어른들은 포장을 벗겨 보니 사진보다 회가 좀 적다는 둥, 모양 안 망가지게 하려고 노력 많이 한 것 같다는 둥 이야기를 나눴다. 아이들은 처음 보는 먹거리가 신기한 듯 이리저리 만져보고 눌러본 후에 입에 넣곤 어릴 적 나와 내 동생처럼 얼굴을 찡그리며 퉤퉤하고 뱉어냈다. 그래, 지금부터 회 먹을 줄 알면 아빠 먹을 게 없잖니... 하다 문득 아버지 생각이 났다. 이런, 옆에서 풋콩만 까먹던 나를 보며 아버지도 이런 못된 생각을 했겠구나!
살면서 후회막심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드시고 싶은 걸 더 많이, 자주 대접하고 보내드렸다면 하는 생각은 늘 든다. 이번처럼 평소에 망자가 좋아했던 것들을 먹을 때면 더더욱. 회이크가 그분 계신 저승까지 배송된다면 프리미엄은 얼마든 얹어줄 수 있을 텐데. 이런 말 하면 그러잖아도 바빠 죽겠는데 정신 나간 소비자라고 할 테지?
바쁜 스타트업 고민거리 하나 늘리지 말고, 내년에는 아버지 기일에 맞춰 모듬 회이크 하나 주문할 요량이다. 부디 그때까지 이 신선한 회사가 망하지 않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