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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가는 길

3. 추억을 상속받다

by 자민


태어나 처음 겪는 일이라는 게 늘 그렇듯, 우연의 연속인 경우가 많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한국을 떠나 다른 나라를 방문하게 되었다. 입학한 학교가 일본 나고야 모 학교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었고, 이따금 각 학교의 학생들이 상대 학교를 방문하는 행사를 가지곤 했고, 마침 그 해가 우리 학교가 일본을 방문할 타이밍이었고, 일본 학교를 방문한다는 이유로 일본어를 제2외국어로 선택한 학생들이 대상이 되었고, 2학년은 바쁘니 1학년이 가기로 결정되었고, 어찌어찌하다 보니 나는 여권이라는 걸 만들고 있었다.


떠나는 날은 방학의 중간을 지나가는 한여름, 딱 이맘때쯤이었다. 굉장히 부산스러운 아침이었다. 인솔교사 포함 여러 명이 함께 떠나는 프로그램이었던 만큼, 대전에서 김포공항까지 가는 길을 생각하면 학교에 새벽같이 모여야 했다. (아직 인천공항이 문을 열기 전이었다.) 하지만 첫 여행 짐이라는 게 그리 쉽게 꾸려질 리가 없다. 돌이켜보면 대체 왜 그랬는지 영 이해가 안 가지만, 나는 고작 3박 4일 일정임을 망각하고 (여행가방도 아니고) 보스턴백에 이것저것 한가득 짐을 욱여넣고 있었다. 뭐가 필요할지 모르니 일단 전부 다 넣자는 주의였을 것이다.


결국 집을 나서며 시계를 보니 집합 시간에 맞춰 학교에 도착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타이밍이 됐다. 우리 집은 대전 끝자락에 있었고, 학교까지 평소 통학시간은 버스로 한 시간 정도 걸렸다. (지금 다시 지도 앱으로 확인해 보니, 2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바로 그 순간, 아버지는 핸들을 잡은 채 슈퍼히어로로 변신하고 있었다.


정상적으로는 아무리 차로 빨리 달려도 20~30분은 걸리는 거리인데, 그는 자식의 첫 해외 나들이를 위해 시간의 한계를 거스르는 엑셀을 밟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선택한 방법은 새벽 시간을 틈탄 과속 및 신호위반이었고, 몇 번의 위험천만한 순간(!)을 넘기며 약속된 시간에 딱 맞춰 학교 운동장에 나를 데려다주셨다. 평소보다 적어도 2배는 빠른 속도로, 조수석에 앉아있던 내가 기겁할 정도로 달리는 데에만 열중하던 아버지의 옆모습은 앞으로도 쉽게 잊기 어렵겠지 싶다.


친한 선배가 몇 년 전 이런 이야기를 했다. 인생의 첫 30년 정도를 자신이 주연인 삶으로 살아왔으면, 자식이 태어난 다음 30년 정도는 내가 주연인 자식을 빛내주는 조연으로 내려오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처음 들었을 때는 과연 그런가 싶다가도, 되새길수록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내 부모가 그랬고, 그 부모의 부모들도 그랬다. 법륜 스님이 곧잘 이야기하곤 하는 '순리'라는 것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그날의 아버지 모습이 자주 생각나는 건, 아마도 자신의 삶, 자신의 커리어보다는 자식을 우선했던 남자의 모습을 극적으로 엿보았던 장면으로 각인되어서일 수도 있겠다. 여전히 나는 조연으로서의 내 모습을 영 어색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멋쩍은 느낌이 들 때마다 떠오르는 장면이기도 하다.


비록 퇴근하고 나서 곤히 자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보는 게 더 익숙한 일상이라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일찍 들어와서 아들이 요새 재미를 붙이고 있는 바둑도 같이 두어주고, 본인에게는 사장 보고보다 더 중요한 이벤트일 태권도 승급 심사에도 얼굴을 내비치려고 노력 중이다. 이 정도야 그날의 과속, 신호위반에 비하면 껌이지 않은가 하며......


다음 주에는 엄마가 친지 분들과 함께 일본 여행을 떠나신다. 한일관계가 심상찮은 이 수상한 시절에 하필 일본이라 슬며시 걱정도 들지만, 그보다는 항상 함께 하던 다섯 형제분들 속에 엄마의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것이 더 마음에 걸린다. 그래도 첫 경험이라는 것은 언제나 항상 놀랍고 신기한 것이니, 엄마가 새로운 풍경 속에서 떠난 짝의 빈자리를 잘 메우고 오시길 바란다. 휴가 내서 인천공항까지 배웅해드리는 것으로 20여 년 전 아버지에게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을 생각이다. 물론 미리 짐 잘 싸놓고 여유 있게 출발해서 티맵 안전운전 점수는 유지하는 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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