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본다
<82년생 김지영>을 두 번이나 보게 될 줄이야.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소액 투자를 했던 것이 발목을 잡았다. 영화 세 편을 묶어서 하는 투자였는데 첫 번째 영화 <사자>가 보기 좋게 흥행에 실패하는 바람에 2번 타자로 나선 <82년생 김지영>의 흥행을 두 손 모아 고대하는 신세가 되었다. 역시 뭐든 자기 돈이 들어가야 진심이 담기는 법.
같이 보러 갔던 아내는 대체로 호평이었다. 2019년 대한민국을 살고 있는 (본인을 비롯한) 30대 기혼 워킹맘의 마음을 콕콕 잘 집어준다는 점에서 후한 점수를 줬다. 남편이 공유라는 등 원작과 다른 사소한 차이는 쿨하게 넘어가기로 한 모양이었다. 하긴 감독도 얼마나 고심했으랴. 남편까지 영 꽝이었다면 러닝타임 2시간으로는 턱도 없었을 터, 이 영화는 시리즈물로 제작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나름 깜찍한 아이디어가 하나 생각났다. 어머니를 모시고 <82년생 김지영>을 보고 오면 가내 평화에 밤톨만큼이라도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요즘 워킹맘의 어려움을 영화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한다면, 일에 치여 정신없는 며느리 보는 시어머니 마음도 좀 더 달라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혼자 기대감이 날로 커져 못 견딜 지경에 이르렀고, 결국 지난 주말에 거사를 감행했다. (사실 투자자로서 흥행에 기여해야지 하는 자기 위안도 절반쯤 섞여 있었다.) 며칠 새 프라임타임은 <겨울왕국 2>가 이미 모두 차지해버린지라, 엘사 발 태풍에 겨우 살아남아 있던 늦은 저녁 시간대 <82년생 김지영>을 어머니와 함께 같이 보게 되었다.
처음 볼 때는 미처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들, 이를테면 '김지영은 국내 최대 통신사 고객이구나...', '역시 아영이한테도 콩순이 카페 놀이 사줬구나...' 이렇게 혼자 깨알 디테일을 즐기던 와중에 옆을 흘깃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나름 스크린 속으로 깊이 빠져들어가 있는 듯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슬쩍 물었다. 오랜만에 보신 영화인데 어떠셨냐고. 돌아오는 대답이 "응, 좋았다. 잘 봤다." 시길래 역시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구나 하며 혼자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는데, 한 마디를 덧붙이신다. “외할머니에게 더 잘해드려야겠어."
아, 그렇구나. 어머니는 어머니의 <82년생 김지영>을 봤구나.
<82년생 김지영>은 소설로, 영화로 동시대 사람들 수백 만의 공감과 지지를 얻었다. 다른 영화나 소설에서는 미처 찾아보기 어려웠던, 30대 워킹맘들이 '내 이야기 같다'라고 느껴지는 일화들이 한 데 모여 세상이 미처 예상치 못한 강력한 폭발력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 이야기 속에서 어머니의 시선이 다다른 지점은 약간은 떨어진 곳이었다. 김지영의 삶이 아닌 김지영의 엄마 미숙, 그중에서도 미숙의 젊은 시절.
좋은 이야기는 주인공이 마치 내 인생을 대변해주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만든다. 어머니는 어릴 적 오빠들보다 공부 잘했던 미숙,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미숙, 그 시절 많은 여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일생의 적지 않은 시간을 재봉틀 앞에서 보내야 했던 미숙, 시어머니에게 타박받던 미숙을 보며 그간의 인생 궤적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리고 아들과 집에 돌아가는 길 내내 미숙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어느새 자기 어머니, 외할머니에게로 이어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기만의 독법으로 작품과 만났고, 여운을 즐기고 계셨다.
집에 거의 다 도착했을 무렵, 어머니가 카운터 펀치 한 방을 더 날린다. "근데 네 아빠랑 같이 봤던 그 뭐냐, 할머니랑 소 나오던 영화 같이 봤던 생각도 많이 나고 해서 극장에서 눈물 나는 거 참느라 혼났다." 아버지랑 두 분이 같이 봤던 영화 '워낭소리' 이야기를 하시는 건가. 10년도 더 된 까마득한 추억이 영문도 모른 채 불쑥 소환됐다. 돈 아깝게 영화는 무슨 영화냐는 두 분을 억지로 잡아끌고 가서 봤던 그 영화. 엄마는 김지영을 보며, 두 노인이 알콩달콩하던 워낭소리도 같이 보고 계셨던 게다. 아마도 두 분이 같이 봤던 마지막 영화.
콘텐츠를 본다는 행위는 그저 단초를 제공하는 것일 뿐, 사람들은 그 속에서 자신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같은 영화를 봤으나 아내는 지영을, 어머니는 미숙을, 나는 대현을 중심으로 보고 받아들이고 있었으니.
나로서는 이런저런 이유로 공유를 꽤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영화였다. 그래서 출근길 아침, 옷깃 꼭 여며야 하는 겨울을 맞은 서울을 벗어나 부산행 열차를 타는 상상을 해 본다. 이곳보다 조금이나마 더 따뜻할 그 도시, 두 번째 귀 기울여 듣는데도 한두 문장은 결국 이해 못했던 걸쭉한 부산 사투리들이 사방에 흠씬 묻어날 그 공간을 가족들과 함께 거닐고 싶다. 공유 못잖은 아빠가, 남편이, 아들이 될 수 있는 시간이 아직은 좀 더 남아있다고 믿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