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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작업노트

인스타 속 힙지로의 시대가 너무 늦게 찾아왔다

by 자민

새해를 맞았다. 다이어리를 쓸 시간이다.


스타벅스 다이어리를 개봉해서 맨 앞 장에 이름을 쓰고 연락처를 적는다. 새해를 맞는 나만의 소소한 의식이다. 수 년째 다이어리를 들고 다니며 그때그때 생각나는 것들, 잊기 쉬운 것들을 적어 내려가는 것이 어느덧 습관이 되었다. 아이클라우드 메모, 에버노트, 노션 등 스마트폰과 실시간 동기화되어 어디서나 꺼내볼 수 있는 다양한 메모 애플리케이션들이 있지만, 올해도 다이어리 쓰는 일을 멈추지는 않을 것 같다. 손으로 한 자 한 자 육필로 써 내려가는 행위가 주는 느낌을 아직은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사춘기 때나 마찬가지로 글씨는 여전히 젬병이지만.


아버지는 컴맹이었다. 평생 자판이 아닌, 펜으로 글씨를 썼다. 간판 제작이 모두 인쇄물로 대체된 지 한참 지난 2000년대까지도 컴퓨터는 아버지에겐 낯선 도구였다. 늘 입만 열면 '컴퓨터를 배워야 하는데'라고 말씀하시긴 했지만 결국 컴퓨터를 배우진 못했다. 유려한 글씨체로 한때 대전 바닥을 주름잡았던 아버지로서는 사실 내심으론 본인의 능력을 대체해버린 기계가 꽤나 미웠을지도 모르겠다.


기술을 잃어버린 채 관리자로서 커리어의 후반부를 보냈던 아버지가 늘 지니고 다녔던 것은 나처럼 노트북 컴퓨터가 아닌 문자 그대로의 노트북, 작업노트였다. 늘 페인트 묻은 작업복 잠바 차림으로 퇴근길 현관문을 열 때, 아버지는 투박한 노트를 한편에 끼고 들어왔다. 요즘처럼 추운 겨울날, 노트를 감싸고 있는 가죽이 주는 꽤나 차가웠던 감촉이 기억난다.


특별한 노트는 아니었다. 요즘의 맵시 있는 다이어리와는 꽤나 차이가 있었다. 매해 조금씩 달라지긴 했지만, 보통 회사에서 지급한 업무수첩이거나 가끔은 보험사나 협력업체로부터 받은 비슷한 형태의 다이어리들이었다. 아버지의 표현을 끌어오자면 '멋대가리 하나 없는 그저 그런 공책들'.


돌아가시고 나서 유품을 정리할 때, 그 손때 묻은 아버지의 작업노트들이 몇 권 나왔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볼품없는 것은 매한가지지만, 달라진 것은 그 노트들이 아버지의 글씨들을 품고 있다는 것이었다.


노트 안에는 자식들이 내용만 보고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업무 관련 메모들이 적혀 있었다. 그 시절 다이어리에는 으레 있었던 뒷면 전화번호부 란에는 회사 거래를 비롯한 각종 전화번호들이 빼곡했다. 스마트폰을 사용하기 이후였는데도 아버지는 전화번호부 정리하는 일은 꽤나 열심이었던 것 같았다. 생전에는 속으로 미련하다 생각했지만, 어른의 감각은 틀리지 않는다. 아버지는 아들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휴대폰을 바꿔주면서 예전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었던 전화번호를 깡그리 날려먹을 것을 미리 알고 항상 백업을 준비해두고 있었다. 물론 이렇게 오프라인 방식으로.


기억은 점점 농도가 옅어진다. 흩어져 가는 기억을 다시금 불러일으키는 것은 사진, 영상, 그리고 떠난 이가 남긴 물건이다. 그중에서도 나는 글씨에 애착이 간다. 한 자 한 자 종이에 박혀있는 글씨는 능동적인 기억이다. 다른 사람이 찍어준 사진이나 영상과는 또 다른, 망자가 스스로 남겨놓은 기록이다.


그런 면에서 아버지가 남긴 글씨가 얼마 남아있지 않은 것은 아쉽기만 하다. 수십 년간 일터에서 고투한 대가로 벌어 온 돈은 모두 자식들의 피와 살로 바뀐 지 오래고, 한때 아버지가 세상에 존재했었음을 온전히 기억해주는 것은 다이어리 귀퉁이에 끄적인 글씨들 몇 자뿐이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이라고, 그 몇 자 글씨들이나마 남아 있기 때문에, 나는 글씨를 쓰던 그 순간의 아버지를 만난다. 그 속에는 바삐 일하던 노동자의 모습도 있고, 첫 손주의 이름을 지어주며 고심하는 초보 할아버지의 모습도 있다.


넷플릭스를 통해 수많은 대중을 사로잡았던 정리의 여왕 곤도 마리에는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라고 이야기한다. 다섯 식구가 복닥복닥 사느라 여전히 집은 난장판이기 일쑤여서 항상 정리하느라 골치가 아프지만, 아버지의 물건들과 이별하기에는 아직 때가 이른 것 같다. 자주 들춰보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끔씩 꺼내보고 싶은 때가 있으니까. 곤도 마리에 식으로 말하자면 이 글씨들은 아버지와 만나는 마법의 통로 같은, 영혼을 가진 존재일 수도 있으니까.


나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훨씬 글씨를 잘 썼던 아버지, 지금까지 좀 더 건강하게 사셨다면 힙지로 간판들 예전 스타일 그대로 새로 써주시면서 인스타 도배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고 쓸데없는, 혼자만의 생각을 해보는 어느 겨울날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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