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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공원

그가 서 있었어야 할 곳

by 자민

가끔 일산에 간다.


그저 잔잔한 호수를 보고 싶어서...라고 말하고 싶지만 실은 우리 동네에 없는 게 많아서다. 냉장고가 비면 코스트코에 가서 고기도 사야 하고, 휴대폰을 바꾸려면 통신사 지점도 찾아가야 하는데 동네에 없으니 자연히 가까운 일산을 찾게 된다. 일산엔 모든 것이 있다. 신도시가 생긴 지 30년이 지나니 이제는 없는 게 없는 수도권 서북부 중심이 되었다. 예전엔 이름처럼 산 하나뿐이었다는데.


얼마 전에도 일산을 찾았다. 엄마가 국민연금공단에 볼일이 있다고 데려다 달라는데, 찾아보니 역시나 집에서 가장 가까운 지사는 일산에 있었다. 공단 정문 앞에 내려드리고 주차한 후 건물에 들어갔더니 엄마가 다시 내려오신다. 서류를 챙겨 왔어야 하는데 빼놓고 와서 근처 주민센터에 갔다 와야 한단다.


투덜투덜 대며 주민센터까지 동행해서 서류를 떼고 오는데, 문득 뒤를 보니 엄마가 사라졌다. 어디 가셨나 하고 두리번거리다 보니 근처 채소가게에서 정신없이 야채들을 쓸어 담고 있었다.


"여기 엄칭이 싸!"

"..."


공단까지는 아직도 꽤 걸어가야 하는데, 무를 저리 많이 사면 누가 다 들고 가나...? 주차도 한참 멀리 했는데 차에까지 가서 실으려면 아이고야. 투덜이 스머프가 되었다. 입이 아까보다 댓발 더 나왔다. 일산은 이렇게 채소가 싸고 좋다며 엄마는 그저 싱글벙글이다. 무에 토마토에 북어까지 꽂아 넣은 비닐봉지를 양손에 들고 뒤뚱대는 아들 맘은 모르고.


공식적인 일산 방문 목적은 두 가지였다. 국민연금공단에서의 볼일을 마쳤으니, 이제는 코스트코에 가야 했다. 언제나 식재료의 선택 기준은 '싼 것'인 엄마에게 뭐든 동네 슈퍼 대비 저렴한 코스트코는 별천지나 다름없다. 근처에 없어 자주 못 가는 게 그저 아쉬울 따름인 곳이다. (엄마는 30년째 장롱면허다.)


5층 주차장에 차를 대는데 뭔가 이상하다. 시동을 껐는데 "치익 치익" 소리가 난다. 늙은 아버지 차가 또 말썽을 부리는 것이다. 급기야 보닛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저러다 불나는 거 아냐? 동생 말마따나 확 팔아버릴 걸 그랬나.


운수 안 좋은 날이다. 마음속 열불을 가까스로 참고 보험사 긴급출동 센터에 전화를 했다. 얼마 있다 레커차가 도착했다. 아버지의 은색 그랜저는 레커차 뒤에 처량히 매달린 채 근처 카센터로 옮겨졌다. 카센터 정비사가 보닛을 열어보더니, 펌프가 오래되어 새는 것이라며 두어 시간 정도 걸릴 것 같단다. 익숙한 동네도 아닌데 무얼 하며 기다리나...? 지도 앱을 켜서 여기가 어딘가 보니 호수공원에서 멀지 않은 것 같았다. 엄마에게 툭 던지듯 이야기했다.


"할 일도 없는데 공원이나 한 바퀴 걷다 오죠."


봄날 호수공원은 생각보다 더 예뻤다. 꽃들이 이리저리 한창이었다. 사람들 여럿이 호수 둘레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엄마는 오랜만의 공원 나들이에 신이 났는지 어느새 저만치 앞서가고 있었다.


반 바퀴쯤 돌았을까. 음료 자판기가 보였다. 잠시 쉬어가자며 엄마를 불러 세우곤 자판기 커피 두 잔을 뽑았다. 나름 삼백 원짜리 고급 커피를 받아 든 엄마는 세상 행복한 눈치다. 자기는 이백 원짜리 밀크 커피 마시고, 엄마는 삼백 원짜리 뽑아주는 아들 덕에 호강한단다.


"좋다. 네 아버지가 살아서 이런 데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


이런, 자판기 커피 한 잔이 아버지를 소환해버렸네.


없는 게 없는 일산에, 꽃들이 만발한 호수공원에 있었지만, 옆자리엔 있어야 할 남편이 없다. 사천 원짜리 아메리카노 앞에서 여전히 멈칫거리는 엄마지만, 모른 체하고 그냥 스타벅스나 갈 걸 그랬나.


그녀는 삼십 년 동반자를 떠나보내고 삼 년을 꼬박 세상 슬픈 표정으로 지냈다. 아들딸이 다 무슨 소용이랴. 평소에도 그런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한 손에 종이컵을 든 채 호수를 바라보는 엄마를 보고 있노라니 더 그랬다. 오늘 이 자리는 그가 서 있었어야 할 곳인데. 밀크 커피를 들고 있었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아버지였어야 하는데.


정신없이 자식을 키우다 잠깐 짬을 내어 부모를 돌아본다. 평생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은 그들이 한순간 사라진다. 아무렇지 않다가도 떠난 이의 빈자리는 그렇게 불쑥 일상 속으로 침입해 들어온다. 만 삼 년 정도면 익숙해질 법한데도 그때마다 마음이 서걱거린다.


언젠간 멎겠지. 나도 엄마도. 그때가 언제가 될 진 모르겠으나, 가끔씩이나마 이렇게 말벗이나마 해드리면서 지내야겠지. 삼백 원짜리 커피 한잔, 삼천 원짜리 무 한단이면 되는데 그게 뭐 어렵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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