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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이 찾아와도 후회하지 않기

영화 <엑시트>를 보고 생각했던 것

by 자민

지난해 여름, 밤늦게 집 근처 영화관을 찾았다. 일과 육아와 더위로 인해 지쳤던지 시원한 콜라와 고소한 팝콘을 즐기며 잠시나마 스트레스를 풀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극장에 가니 조정석 임윤아 주연의 <엑시트>가 당시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고 있었다. 부담 없는 코미디 영화라는 간단한 설명을 보고 큰 기대 없이 표를 끊어 좌석에 앉았다. 애들을 재우고 슬며시 나와 호로록 마시는 콜라는 달착지근했고, 팝콘은 더할 나위 없이 고소했다. 이미 목표의 절반 이상은 이룬 셈이었다. 이제 영화는 무섭거나 졸리지만 않으면 되었다.


용남(조정석)과 의주(임윤아)는 러닝타임 내내 잘 달렸다. 그동안 봐왔던 재난영화들과는 다르게 <엑시트>에서는 재난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서사의 상당 부분이 생략되고, 산악 클라이밍 동아리 출신인 두 주인공이 재난으로 초토화된 도심 곳곳을 뛰고 기어오르고 뛰는 액션이 주를 이룬다. 건물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용남과 의주를 보며, 공포영화가 아닌데도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 수가 있구나 하며 감탄했다. 영화 내내 지루할 새가 없었다. 이상근 감독은 두 시간이 채 안 되는 짧은 상영시간의 대부분을 관객들이 주인공들의 질주에 몰입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고, <엑시트>는 천만 가까운 관객을 동원하며 지난여름 최고의 흥행작이 되었다.


그새 겨울이 지나고 꽃들이 움트는 봄을 맞는 중이다. 여름 피서철 타깃 영화인 <엑시트>가 떠오르기엔 아직도 바깥바람이 차다. 그래도 간간이 그 영화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두 주인공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클라이밍 장면보다는, 영화 속에서 양념처럼 곁들여졌던 또 다른 클라이밍, 등짝으로의 클라이밍 때문이다.


영화의 중요 소재가 되는 어머니의 칠순잔치 초반, 찌질한 백수 캐릭터인 용남은 두 매형들에게 밀려 어머니를 업어드리는 아들로서의 당연한(?) 미션을 수행하지 못한다. 사람들의 목숨을 위협하던 재난으로부터 겨우 벗어나 다시 가족들과 재회하게 되는 순간, 용남은 어머니가 손사래를 치는 통에도 기어이 그녀를 등에 업고 덩실덩실 춤을 춘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아차..." 싶었다.


아버지를 등에 업어 본 적이 있던가.


아버지가 환갑을 맞으셨을 때, 나는 부모 곁에 없었다. 타국에서 영상통화로 간단히 안부를 전했을 뿐이다. 꼭 환갑이나 칠순 같은 잔치에만 부모를 업으라는 법은 없으니, 아무 때나 마음만 먹으면 한 번 업어드릴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부모를 업어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야 비로소 부모를 업어볼 수 있다. 그러니까, 그전까지 나는 살면서 부모를 업어보겠다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자식이라는 이야기다. 이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아비는 진즉 떠나고 없다.


돌이켜보면 질풍노도의 정점을 달리던 십 대 시절, 아버지에게 반항하던 기억들만 오롯하다. 저 잘난 줄만 알던 이십 대의 젊은 아들도, 본인은 미처 몰랐지만 이미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고 있었던 아버지에게 참 못되게 굴었다. 어떻게 자식들은 늘 저 혼자 세상에서 뚝 떨어져 자라난 줄로만 아는 것일까.


아버지 한 번 등에 업어 봤다고 자식 된 도리 다하는 것 아니지만, <엑시트>를 보고 나서 가끔씩 영화 결말부의 덩실덩실 춤추는 그 장면이 떠오르곤 한다. 부모 한 번 업어보지 못하고 이별하게 되면 어떡하나 하는 용남의 마음을 연기로 잘 표현해준 조정석 배우 덕택일 것이다.


아직 곁에 계신 두 분 어머니의 칠순 잔치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때가 되면 번쩍 업어드릴 수 있도록 지금부터 몸 관리 잘해야지 싶다. 물론 아무 때고 업어드릴 수 있지만, 다짜고짜 업어드린다고 하면 두 분 다 절대 싫다고 손사래 치실 분들이니 잘 기회를 엿봐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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