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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비 내리는 날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가장 덜 후회하는 습관 만들기

by 자민

여의도 벚꽃축제가 취소되었다. 석촌호수에 발도 들이지 말라는 긴급 알림 문자가 징징 울린다. 각급 학교 개학이 두 달 늦어지는 것도 모자라 온라인으로 개학을 하는 판국이니, 벚꽃은 사치가 되었다.


그래도 길가를 지나다 마주치는 벚꽃을, 개나리를, 진달래를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걸 보니 봄이 오긴 왔다. 요즘 열심히 단어를 깨치고 있는 네 살박이 둘째는 "아빠 저 분홍색 꽃 뭐야? 오빠랑 같이 사진 찍자."라며 옆에서 애교를 피운다. 코로나 19가 사람들을 숨죽이게 만들었지만, 봄꽃들은 그래도 세상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한다.


마스크를 쓰고 길을 걷다 흩날리는 벚꽃비를 맞았다. 맞아, 그날도 그랬다. 4년 전 봄. 아버지와 함께 보냈던 마지막 봄.


첫째를 잠시 부모님께 맡겨야 하는 상황이었다. 어머니는 암투병을 막 시작한 아버지와 갓 돌 지난 아이를 같이 돌보느라 꽤나 고생하셨지만, 덕분에 아버지는 반년 남짓 온전히 손주와 함께 지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나와 아내는 매주 주말마다 대전 본가를 찾았다. 물론 부모님을 찾았다기보단, 아이를 찾아 돌아가는 주말여행이었다.


4월 어느 봄날이었고, 동네 어귀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집 앞 천변 공원에도 꽃들이 만발했다. 멀리 봄나들이 갈 필요 없이, 우리는 간단히 돗자리 하나 챙겨 들고나가 봄을 만끽했다. 이제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아기는 모두에게 웃음꽃을 안겨 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벚꽃비가 내렸다. 그리고 아내는 고맙게도 그 광경을 휴대폰 동영상으로 찍어 두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아들이 나란히 걸어가던, 벚꽃비가 내리던 그날 그 순간을. 십몇 초에 지나지 않는 그 짧은 동영상이 아버지와 내가 보낸 마지막 봄날의 빛과 소리를 담은 유일한 기록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아버지가 떠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영상은 사진보다 훨씬 풍부한 기억을 전달해준다.
영상을 보고 있다 보면 그날의 감각이 되살아난다.


무엇보다, 소리가 담겨 있다. 다시는 듣기 어려운 목소리가 그 속에 고이 담겨 있다. 지나고 나서야 고인의 모습과 육성을 담은 영상을 몇 개 찍어두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이별 후에 후회해봤자 별무소용이다. 부모님이 아직 살아계신 벗들에게 틈날 때마다 영상 많이 찍어 두라는 조언을 하는 것만 습관으로 남았다.


아버지로부터 얻은 이 교훈을, 요즘에는 가족을 위해 십분 활용하는 중이다. 하루에 한 개씩, 30초에서 1분 정도 길이의 짧은 영상을 찍어 둔다. 집에서 블록 쌓기 놀이를 하는 아이들, 놀이터에서 그네 타는 아이들, 꽃을 보고 감탄하는 아이들...... 그렇게 2020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와 아이들의 모습을 담아두고자 애쓴다.


아이들은 금세 자랄 것이고, 점점 요정처럼 작고 귀여웠던 자신들의 과거를 잊어갈 게다. 내 영혼을 구원해주고 있는 이 작은 천사들이 자신들이 어디에서 왔음을 점점 잊어갈 때, 틈틈이 찍어둔 영상은 자신들이 이렇게 켜켜이 쌓인 일상을 자양분으로 자라났음을 증명할 것이다. 나중에 다 크고 나면 어린 시절 영상을 혼자 들춰보며 지금의 자신이 존재할 수 있게 해 준 많은 햇볕과, 공기와, 바람과, 사람을 기억하는 이들이 되길 바란다. 후줄근한 운동복 차림에 졸린 눈 가득한 아빠 모습이 눈에 계속 걸리는 투박한 영상들이라도.


4차 산업혁명 시대란다. 동영상을 만들고 기록하는 비용도 계속 더 낮아져만 간다.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기기라기보다는 점점 더 영상을 찍고 저장하는 카메라에 가까워져 가는 스마트폰은 항상 손에서 떠나지 않는다. 여전히 습관처럼 사진을 찍고 있다면, 한발 더 나아가 짧은 영상을 남겨보기를 추천한다. 편집은 언제 하냐고? 인공지능이 알아서 해줄 세상이 머지않았으니 찍어만 두자. 원본을 만들어두는 것, 그것이 오늘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몫이다. 오리지널이 없으면, 에디팅도 없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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