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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미루지 말아야 할 것들

소중한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생각보다 짧다

by 자민

콘텐츠 플랫폼 퍼블리 뉴스레터를 통해 재미있는 TED 강연을 보게 되었다. 팀 어번(Tim Urban)의 '할 일을 미루는 사람들의 심리(Inside the mind of a master procrastinator)'라는 14분짜리 짧은 영상이다. 할 일을 미루지 않는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특히나 자신의 졸업논문 준비 경험을 소개하며 미루는 사람의 심리를 설명하는 부분은 최근의 내 모습과 정확히 맞닿아있어서 보는 내내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팀 어번은 테드 강연 준비 전에 구글 어스를 켜고, 나는 영화와 드라마를 본다는 차이만 있을 뿐.



팀 어번의 강연은 조회수가 3천7백만 뷰에 이른다. 그만큼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을 미루려는 심리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 같다. 강연을 보다 보니 예전에 봤던 책도 떠올랐다. 앤드류 산텔라의 '미루기의 천재들'이라는 번역서다. ('Soon: An Overdue History of Procrastination, from Leonardo and Darwin to You and Me'이라는 긴 원제목보다 '미루기의 천재들'이라는 국문 제목이 내용을 더 깔끔하게 압축했다는 생각이다.)


이 책을 볼 때도 TED 강연을 볼 때처럼 혼자 킬킬거리며 즐겁게 봤다. 그 위대한 다윈도 진화론을 출판하기 전에 엄청나게 미적거렸구나... 하는 뜬금없는 동질감(?)을 느끼면서.



매사가 미루고 미루고 또 미루다 보니 결국 모두가 행복했습니다......라는 결말로 끝나면 얼마나 좋을까만은, 아쉽게도 인생에서 그런 일은 드물다. 어번의 강연에서 깔끔하게 정리해주고 있는 것처럼, 할 일을 미루는 사람 (그러니까 우리 모두의) 머릿속에 있는 '순간적 만족감 원숭이'는 '합리적 의사결정자'와는 대척점에 있는 경우가 많으니까.


살다 보면 미루지 말아야 할 것들도 있는 법이다.


다음번에, 다음번에... 하면서 미적거렸던 것들 중에서도 가장 아쉬운 것을 하나 꼽자면 부모님과의 해외여행이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제 밥벌이를 하기 시작하면서 나만의 버킷 리스트를 만들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부모님과 함께 떠나는 해외여행이었다. (근교 여행 말고 꼭 폼나는 해외여행이어야 했다.) 자식들 키우는데 바빠 여행은 꿈도 못 꿨던 부모님 두 분을 모시고 가까운 일본이나 중국이라도 같이 갈 수 있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싶었다.


아버지는 나름 거창했던 아들의 계획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해외여행은 더 나이 든 후에 가도 괜찮다시며, 얼른 월급 모아서 네 살 궁리나 하라 하셨다. 나 역시 막상 휴가기간이 다가오니 부모님과 함께 여행을 가는 계획이 정작 부담스러워졌다. 일에서 벗어나 휴가철만이라도 맘 편히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 한쪽에 똬리를 틀었다. 아버지는 기껏해야 이삼일에 지나지 않는 짧은 여름휴가를 쪼개어 형제자매들, 그러니까 삼촌 고모들과 함께 보내는 쪽을 택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열 번 남짓한 휴가가 있었다.


정신 차려보니 열 번의 기회가 눈 녹듯 사라져 있었다.

물론, 해외여행을 다녀왔더라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수 있다. 말은 '해외여행'이었지만, 실제 의미는 '밀착된 시간'이었다. 일상에서는 같은 공간에 있더라도 각자의 시간을 살아간다. 함께 지내더라도 그 시간 내내 서로 교감한다고 보기 어렵다. 누구는 TV를 보고, 누구는 말없이 밤을 깎는다. 서로 깊이 소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상은 기억되지 않고 쉬이 흘러내려가기 일쑤다.


여행, 특히 해외여행은 전혀 새로운 환경에서 시작된다. 낯설면 낯설수록, 그 땅에서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동행뿐이다. 자연스럽게 옆에 있는 사람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늘어나고, 평소보다 더 많이 서로에게 기대게 된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그동안 몰랐던 상대방의 새로운 면들을 깨닫는다.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안다고 흔히 착각하는 직계가족이 동행이라면 더욱 그렇다.


많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그러하듯, 나 역시 아버지와 단둘이서 보낸 시간이 많다고 할 수 없었다. 학업을 이유로 서울에 올라와 있을 때에도, 미국에 있을 때에도 전화 상대방은 늘 어머니였고 아버지와는 간단한 인사 이상의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나이 든 아버지와 아들은 대체 왜 그렇게 서로를 내외하는 것일까?)


지난해 봄, 어머니를 모시고 오키나와 여행을 다녀왔다. 아버지를 잃고 난 후에 했던 후회를 나중에 한 번 더 하고 싶지는 않았다. 짧은 기간 동안 예상을 벗어나는 경험을 많이 겪었던 여행이었다. 처음 가보는 나라에서 어머니는 물 만난 물개처럼 수영장을 휘저으셨고, 민속촌에서 기모노를 입어보곤 새색시처럼 환하게 웃으셨다. 어머니도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와 같이 왔다면 훨씬 더 좋으셨겠지.


하지만 이제 인생의 선택지에서 그 옵션은 지워지고 없다는 것을 나도, 어머니도 안다. 아버지의 부재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며 일상을 살아간다. 미루는 건 신나고, 스릴 있고, 가끔은 생산성을 높이는 데도 도움을 주지만, 어떤 것들은 너무 미뤄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가슴에 담은 채로. 특히 그것이 소중한 사람에 관한 것이라면 더욱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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