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적의 시간이 필요하다. 회사일도 육아도 집안일도.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땐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릴 수 있지만, 애보기는 눈물 없인 불가능하지 싶다. 세탁기 위 울 빨래 버튼만 눈에 들어와도 울컥한다. 영화 속 김지영이 이런 마음이었을까. 주부 우울증이 괜히 오는 게 아니다.
새해부터 회사에 안 나가기 시작했으니, 두 아이 육아를 한답시고 집에 들어앉은 지 그새 100일 정도 되었다. 앞에 '고작'이란 형용사를 붙이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들만큼 짧은 시간. 그 와중에도 하나하나 새로운 깨달음이 쌓여간다. 그럴 때마다 한 움큼씩 생겨나는 부끄러움은 물론 덤이다.
처음에는 ‘회사 일에 비하면야 집안일은 껌이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늘 집이 어지럽다 불평했었기에, 시간만 나면 이 어지러운 난장판 같은 공간을 금세 깨끗이 만들겠다고 외려 이를 갈던 터였다. 미국 유학 시절 쌓았던 요리실력도 어디 가지 않았을 것이었다. 아이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며 사이좋게 지내는 장면을 머릿속에 그렸다.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었다. 시간만 충분히 주어진다면.
100일이 흐른 지금, 그것이 얼마나 큰 오판이었는지는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아이들과 잘 지내지 못했던 것은 그저 시간의 문제가 아니었다. 휴직을 하고 함께 지내는 시간이 늘어나면 아이들은 절로 아빠와 죽고 못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니... 순진하긴. 육아와 집안일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어서 와 풀타임 육아는 처음이지?
어떻게 감히 '나는 잘할 수 있어'라고 자신만만해할 수 있었을까. 사실상 풀타임 육아는 처음인데. 저녁 혹은 주말에 잠깐 아이를 보는 것과, 내내 아이를 보는 것은 교류의 밀도 자체가 다르다. 굳이 비교하자면 알바와 사장 정도의 갭 아닐까.
사람들은 가까워질수록 서로에게 못난 모습을 더 많이 보이기도 한다. 수현이는 요즘 '아빠는 정말 나빠'를 입에 달고 산다. 거의 매일 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수현이와 싸우지 말고 하루를 보내야지'라는 다짐을 하지만, 저녁 무렵이 되면 새 아침의 다짐은 안드로메다로 떠나고 전투태세가 된다. 학습지 숙제를 하느냐 마느냐를 둘러싼 공방이 일어날 때, 수현이가 TV 광고에 나오는 장난감을 사달라는 조르기 신공을 지속적으로 펼칠 때, <쿵푸팬더> 같은 (폭력적인!) 영화를 보고 나서 흥에 겨워 아빠를 샌드백 삼아 차고 때리면, 뇌에서 위험신호가 울린다.
모든 것을 따라 하는 둘째가 오빠를 따라 한다고 합세하고 나면 1+1=2라는 물리적 법칙은 사라지고 육아 스트레스 게이지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그러다 펑. 펑펑. 퍼퍼펑. 내가 이렇게 화를 많이 내는 사람이었다니. 아이는 서러움에 몸으로 울고, 아빠는 자괴감에 마음으로 운다.
매일 비슷한 패턴이 반복된다. 석 달을 채 못 버티고 복직했다는 누군가가 떠오른다. 남 이야기가 아니다.
집안일은 끝이 없다
집안일은 끝이 없다. 정리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인데도, 방 세 개짜리 작은 집 하나 정리하는 데 한 달이 꼬박 걸렸다. 큰방, 작은방, 주방, 냉장고, 옷장, 다용도실... 겨우 물건들을 있어야 할 자리에 놓아두고 한숨 돌렸더니 가족들로부터 엄청난 잔소리에 시달려야 했다.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정리해뒀던 것을 다 헤집어놓았으니 겉으로는 말끔하지만 속은 다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것. '내가 이것들 다 (효율적으로 찾을 수 있게) 정리했어'라고 뽐내려다가 큰 코 다친 셈이다.
집안일은 묘하게 회사일과 상통하는 면이 많다. 회사에서도 누군가가 잠시 프로젝트에 들어와서 한꺼번에 정리한답시고 이것저것 쑤셔놓고 쓱 빠져나가면 뒤치다꺼리하느라 얼마나 골치 아픈가. 집안일이라고 다르지 않은데, 혼자 의기양양하게 일을 벌인 것이 문제였다. 새로운 시스템이 자리 잡고 익숙해질 때까지 시간이 필요한 것은 어디나 마찬가지다.
아이들 방은 매일매일이 카오스의 연속이다. 치우고 뒤돌아 서면 꿈에서 치운 게 아니었을까 싶을 만큼 다시 어질러져 있다. (요괴워치에서처럼 ‘어지르기 유령’이 붙어있는 것이 아닐까 진지하게 생각했다.) 틈타는 대로 계속 치워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치울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이것도 딱 서비스 운영하는 일과 같은 맥락. 그냥 두면 점점 더 엉망이 되어 간다. 누군가는 계속 백그라운드에서 궂은일을 하고 있어야 한다. 알아주는 사람은 없더라도, 치워야 한다. 아니 치워야 산다. 사람의 온기가 집안 분위기를 좌우한다는 옛말이 틀리지 않다.
좋은 아빠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아이들과 시간만 많이 보낸다고 저절로 좋은 아빠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충분한 시간은 그야말로 시작점에 불과했다. 아이들과 눈을 맞추고 그들의 입장이 되어 이해하는 것은 이미 90년대생 회사 동료들도 이해하기 어려워지고 있는 내게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왜 자기 전에 칫솔질을 잘해야 하는지', '왜 동생과 싸우면 안 되는지', '왜 사고 싶은 장난감을 모두 살 수 없는지'를 이해시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마 영영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무엇이든 능숙해지기 위해서는 축적의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이제 고작 서너 달 온전히 아이들과 부대꼈을 뿐인데, 같은 처지에 있는 다른 주부님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는 깨닫는다. 은연중에 과거의 나 역시 집안일과 육아를 '아무나 할 수 있는, 별 것 아닌 일'로 치부하고 있었다는 것을.
맞벌이로 일하던 시절, 회사 일을 핑계로 집에는 거의 붙어있지 않았던 과거를 반성한다. 아내는 똑같이 아침에 나가 저녁에 들어오는데도 이미 아이들 봄옷이 어디에 있는지, 예방접종을 어디까지 했고 무엇을 더 맞아야 하는지, 애기옷은 어떻게 드라이클리닝해야 하는지 다 알고 있다. 워킹맘에 비하면, 나 같은 아빠들은 대체 얼마나 쉽게 회사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인가. 아이들이 엄마가 1순위인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 지난 수년간 나와 아내가 둘 다 늦는 날이면 어머니는 혼자 천방지축 아이들 둘을 데리고 밥을 먹이고 씻기고 치카치카시켜서 재워야 했다. 지금보다 아이들이 더 어렸으니 더욱 힘드셨을 게다. 부모 말도 잘 안 듣는 아이들 이 할머니 말이라고 고분고분 잘 들었을 리 없다. ‘저 일하느라 좀 늦게 들어가요'라고 카톡 하나 딸랑 남기는 게 얼마나 어미에게 무심한 일이었던지 이제야 비로소 마음으로 이해하게 된다.
100일 정도 지났으니, 그래도 어느덧 초보 딱지는 뗀 게 아닐까. 지금까지 좌충우돌했던 소중한 경험들을 바탕으로 내일은, 아니 오늘 저녁부터는 아이들에게 좀 더 자상하고 좋은 아빠가 되어야지 다시금 다짐한다. 그러다 보면 엄마도 언젠간 따라잡을 날이 올 수도 있겠지.
할 일이 많다. 스타 크로스 장난감 시리즈도 다 외워야 하고, 바둑도 아슬아슬한 차이로 져 줘야 하고, 치과놀이 환자도 되어서 입도 뻐끔뻐끔 잘 벌려야 한다. 물론 그사이 애들 밥도 먹여야지. 수행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데, 잘 해낼 수 있겠지? 오늘은 제발 너무 기상천외해서 예측 불가능한 미션만 발생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주은아, 너는 마녀 배달부 키키가 아니라 빗자루를 타고는 하늘을 날 수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