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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구세트 한 벌

선물도 다 때가 있다

by 자민

뚝딱거리는 건 영 젬병이다.


아내에게는 집주인과의 마찰을 굳이 일으키고 싶기 때문이라고 둘러댔지만, 신혼집을 꾸밀 때도 액자 하나 걸어두지 않은 건 사실 콘크리트 못 박는 것 하나 두려워하는 성격 탓이 크다. 대학 신입생 때는 농촌봉사활동 간다고 선배들 따라 쫄래쫄래 내려갔다가 밭에 나간 지 한 시간 만에 낫으로 내 손을 찍어 곧바로 병원으로 직행한 적도 있다.


비슷한 사건들이 몇 번 계속되자 어머니와 여동생은 과도로 사과를 깎는다고 해도 영 못 미더워한다. 함께 산 지 꽤 시간이 지난 때문인지 요즘에는 아내도 이 대열에 심심찮게 합세하고 있다. (얼마 전 현관문 도어스토퍼를 제대로 못 달아 끙끙대다가 결국 아파트 관리소 선생님 도움으로 해결한 이후 더 심해졌다.)


얼마 전 우연찮은 기회에 건자재를 주로 취급하는 용품점에 들렀다. 대형마트나 쇼핑몰에 가도 공구나 자재 쪽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었는데, 역시 세상 오래 살고 볼 일. 약속 시간까지는 시간이 꽤 남아있어 용품점 내부를 찬찬히 둘러봤다. 미국 가정집 차고에나 있을 법한 공구들과 자재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한국도 꾸준히 소득이 증가하면서 혼자 집을 꾸미는 셀프 인테리어 시장이 많이 커지고 있구나... 하는, 회사에서 보고서 쓸 때나 작동시키는 건조한 마인드로 매장 안을 거닐었다.


역시 내 취향은 아니구나... 하며 짧디 짧은 아이쇼핑을 끝내려는 찰나, 페인트통 한 무더기가 눈에 들어왔다. 오랫동안 기억 속 저편에 미뤄뒀던 초록색 각진 페인트통, 그러니까 옛날 말로는 뺑끼통들. 한 때는 아버지의 밥줄이었던, 그래서 집안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었던 그 통들. 코를 막을 정도로 독한 냄새를 풍겨 제비와 노루라는 자연친화적인 이름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던 그 통들이 시대를 건너 한층 유려한 모습으로 포장대 앞에 진열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빨갛고 파란 페인트를 물감 삼아 하얗디 하얀 천에 쓱쓱 글씨를 써 나가곤 했다. 기다란 현수막 천이 아버지의 화폭이고, 화선지였다. 페인트가 어느덧 마르면, 꼭 인쇄기로 찍어낸 것처럼 정갈하게 글씨들이 수놓아져 있었다. 분명 아무것도 없는 흰 천이었을 뿐이었는데, 그 위에 새로운 것이 생겨났다. 아버진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사람이었다.


페인트에 대한 어린 시절의 기억이 항상 좋았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부정적인 경우가 더 많았다. 수산시장 자식들이 생선 냄새나는 부모를 멀리하듯, 나는 작업복과 평상복을 막론하고 항상 묻어 있는 페인트, 뺑끼가 진저리 나게 싫었다. 학교에 계신 선생님들처럼 양복을 입고, 깔끔한 차림새로 다니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곤 했다. 은연중에 블루칼라 아버지를 부끄러워했던 게다. 남들과 모든 걸 비교하는 사춘기 때는 정도가 더 심했다.


옛 생각과 함께 페인트 매대를 지나고 나서 다시 매장 쪽을 돌아보니, 방금 전 쓱쓱 지나쳐버린 공간들이 전혀 다르게 보였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나의 눈이 아니라, 수십 년간 현장에서 살아온 아버지의 눈으로 보기 시작했으니까.


예전에는 생각도 못했던 예쁜 팝아트 디자인의 페인트, 벽을 수십 번은 뚫을 수 있을 것 같은 전동공구 세트, 절대 주인의 발을 안 상하게 만들 것 같은 작업화... 정신 차려 보니 나는 구석에 앉아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랑 같이 올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공구세트 한 벌쯤 턱 하니 사드렸을 텐데.


무심한 아들에게 모처럼 선물이란 걸 받고 덩실덩실 춤추셨을 아버지 얼굴을 상상했다. 이뤄질 수 없는, 그저 상상 속의 일이다. 꿈에서라도 가능할지 모르겠다. 내가 보고 싶다고 덥석 나오시는 분이 아닌지라.


여동생이 말하길, 매부가 인테리어 용품점에 같이 나오게 되면 하루 종일 죽치고 있는단다. 생각해보니 나랑은 참 다른 사람이 가까운데 있다. 새 집을 장만하고 나서 손수 집을 꾸몄던 아버지처럼, 매부도 이리저리 집 꾸미는 것 좋아하고, 온갖 장비 사모으길 퍽 좋아한다. 아버지가 동생에게 나 몰래 슬쩍 귀띔해준 것일까? 오빠한테 지금 이렇게 툭 이야기해놓으면 언제 남편에게 선물 하나 해줄지도 모른다고?


동생네 놀러 오면 남자 둘이 조용히 쇼핑이라도 하러 나서야겠다. 오는 길에 순대에 소주 한 잔 하면 더없이 좋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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