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면 모두가 시한부 인생
"이번에는 뭐 싸주지 마. 진짜 집에 놓을 데 없어."
5월 연휴 때 처가에 다녀왔다. 아내는 내려가기 며칠 전부터 전화로 신신당부를 드린다. 나는 지레 못 들은 척, 슬며시 주차장에 내려가 차 트렁크를 치워둔다. 우린 늘 그렇게 전화를 하고, 늘 그렇게 트렁크를 비운다.
서울로 올라갈 무렵이 되면, 장모님은 헛간에서 그간 쟁여뒀던 것들을 꺼낸다. 사과, 참외, 토마토, 간장, 된장, 고추장... 끝도 없이 나온다. 난 트렁크 안쪽을 계속 들여다보며 조금이나마 물건이 들어갈 틈새가 있는지 궁리한다. 테트리스 퍼즐 맞추듯 끼워 맞춰 겨우 집어넣고 만세! 소리를 지르며 억지로 트렁크 문을 닫으려는 찰나에 장모님이 옆에서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한마디 하신다. "자네, 차 더 큰 걸로 바꿔야 않겠나?" 휴직자 사위는 그저 빙그레 멋쩍게 웃을 뿐.
늙은 점심상 앞에서 장모님은 아내에게 "내 이제 살면서 몇 번이나 같이 밥 묵겠노? 한 스무 번쯤 남았을라나?"라고 웃음 섞어 이야기하신다. 아내는 무슨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손사래를 치지만, 따져보면 영 틀린 말씀은 아니다. 멀리 산다는 핑계로 명절 아님 생신 때나 찾아뵈니, 모녀가 같은 지붕 아래 누워 자는 건 일 년에 고작 며칠이다. 앞으로 삼십 년을 더 사신다고 해도 이런 식이면 합해야 고작 반년 남짓. 아내에게는 엄마와 같이 밥을 먹고 같은 베개를 베고 함께 도란도란 말을 섞을 시간이 얼추 그 정도 남은 셈이다. 한때는 매일같이, 아침저녁으로 부대꼈을 그녀들인데. 30년쯤 남은 줄 알았던 시간이 사실 6개월밖에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을 때 겪는 마음의 낙차는 꽤 크다.
처음 들은 것도 아니고 종종 농반진반 하시던 말씀이라 새로울 게 없는데, 이번엔 올라오는 내내 그 말씀이 맺혀 있었다. 절대적인 시간이 갖는 의미에 대해 다르게 생각해보게 된 것도 장모님 넋두리 때문이었던가.
대학을 다니러 서울로 올라온 게 스무 해 전이다. 처음 모든 것이 낯설 땐 무작정 영등포역으로 갔다. 노란색 무궁화호 승차권을 끊어 집에 내려가는 길은 잠시나마 편안했고, 가슴엔 그리움이 일었다. 그러나 점점 대전에 내려가는 일은 뜸해졌고, 새로 사귄 친구들이 부모와 동생의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이십 년을 함께 산 가족은 일 년에 두세 번 보면 자주 보는 사이가 되어갔다. 졸업을 하고, 직장을 잡고,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며 새로운 가정을 꾸렸다. 그렇게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 독립을 이뤘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멀어졌던 아버지와의 접촉면이 다시 넓어진 것은 당신이 갑자기 암 판정을 받고 나서였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고서야 금요일 밤에 본가를 찾기 시작했다. 주말은 짧았다. 그런 생활도 세어보면 몇 달에 불과했다. 나는 곧 처자식을 데리고 유학을 갔고, 한국에 들어와 지낸 여름 두 주를 빼곤 줄곧 떨어져 있었다. 2년 넘는 투병기간 동안, 아들로서 아버지와 함께 지낸 물리적인 시간은 많이 쳐줘야 겨우 한두 달에 불과했다.
"사실, 아빠가 많이 서운해했어."
자식은 자식의 삶을 살아야 하니 곁에 없어도 괜찮다 하셨던 아버지도, 몸과 마음이 모두 무너져가는 마지막에 와서는 멀리 떠나 있는 아들의 존재가 못내 서운하셨단다. 얼마 전 어머니가 대신 전해주셨던 그 말 한마디, 그것은 그간 내가 가장 듣길 두려워했던 고백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남아있는 사진들을 정리하다 보니, 스무 살 지나서부터는 함께 찍은 사진이 손에 꼽을 정도로 줄어들기 시작한다. 몇 년에 한 번 꼴로 서울 올라오셨을 때 나들이랍시고 경복궁에서 찍은 사진 정도가 청년 시절의 나도 여전히 그의 자식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간신히 남았다.
영원하지 않으니, 하루를 일 년같이 살아야지.
백 년을 산다 해도 속을 들여다보면 시간은 잘게 쪼개져 있다. 순간을 옆에서 함께 보내는 사람들은 계속 변해간다. 아이들은 점점 또래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많아지고 어느덧 홀로서기를 준비할 때가 온다. 부모형제도 일 년에 한두 번 보면 다행인, 어느 땐 이웃사촌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가기도 한다. 젊은 날 평생 함께 할 것 같이 먹고 마시던 벗들도 정신 차리고 둘러보면 언제 만났는지 기억조차 희미하기 일쑤다. 그저 무소식이 희소식이겠거니 하고 산다.
시간의 유한함이란 절대 진리에 내가 맞설 방법은 지금 이 순간, 오늘 하루에 집중해서 잘 살아내는 것.
아들딸이 나중에 독립한 후 일 년에 단 하루 아빠를 보러 온다고 생각하면, 오늘 이 친구들과 함께 지내는 하루는 미래의 일 년과 같은 비중인 셈이다.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좋은 추억들을 하나하나 쌓아가는 것, 그것이 하루를 일 년같이, 일 년을 백 년같이 쓰는 법임을 이제야 겨우 알 듯하다.
장모님 뵈러 조만간 또 내려가야지 싶다. 마흔이 되어가도록 현명하게 시간 쓰는 법을 터득하지 못한 사위에게 살짝 인생 원포인트 레슨 해주신 것에 감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