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 마음속에 늘 살아있는 사람
미세먼지라고는 눈 씻고 봐도 찾아낼 수 없는 계절이다. 이렇게 푸르디푸른 하늘만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싶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보고 있자니 자꾸만 엉덩이가 들썩인다. 가까운 곳이나마 나들이 나가고 싶은 마음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아 어쩌란 말이냐.
결국 참지 못했다. 코로나19도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지 않은가. 아이들을 태우고 집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드라이브를 나갔다. 창밖으로 보이는 초록빛 나무들만 봐도 즐겁다.
사람들이 많지 않은 카페를 하나 찾아냈고, 적당히 거리를 두고 네 가족이 둘러앉았다. 차도 마시고, 책도 보고, 이런저런 놀이도 하며 오후 한나절을 보냈다. 행복이 별건가.
집에 돌아오는 길은 나설 때와 달리 아이들 눈이 말똥말똥하다. 푹 잠이라도 자 두면 아내랑 둘이 못다 한 이런저런 이야기나 나눌 텐데 전혀 기색이 없다. 제발 잠들어라 하고 주문을 외다 포기하고 아이들이랑 함께 차 안에서 할 수 있는 게임을 하기로 했다. 먼저 눈치~ 게임! 애들을 재우기 힘들 때 곧잘 하는 놀이다. 게임 시작! 하고 내가 먼저 하나! 하니 수현이가 둘! 아내가 셋! 그리고 아직 눈치가 없는 막내는... 운다. 음... 우리 다른 게임 할까?
이번엔 출석 놀이를 하기로 했다. 수현이가 자기 마음속에 있는 출석부 속 이름을 하나씩 호명한다. 차 안에 함께 타고 있는 사람들이 차례로 대답한다.
"아빠!" 출석! 내가 대답한다.
"엄마!" 출석! 아내가 대답한다.
"동생!" 출석! 둘째가 대답한다.
"고모!" 결석!
"고모부!" 결석!
"할머니!" 결석!
"할아버지!" 결석!
"아빠, 아니야 틀렸어. 할아버지는 출석이지!”
"응? 왜?"
"에이 아빠~ 할아버지는 눈에 안 보이지만 우리 옆에 같이 타고 있잖아~!"
목구멍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어린 손자가 장성한 아들보다 낫다.
누군가는 그랬다지. 친애하는 이를 잃은 슬픔도 슬픔이지만, 그를 잃었다는 사실조차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져 가는 그 사실은 또 다른 종류의 슬픔이라고.
만 3년이 지나는 동안, 어느덧 아버지의 자리가 늘 비어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는 이제 가고 없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기에 나는 아버지의 부재를 묻는 수현이의 호명에 “결석!”이라고 아무런 느낌 없이 단조롭게 답했다. 그런데 그런 내게 아들은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네가 틀렸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멍청한 녀석 하고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꿈나라로 떠나기 직전의 아이 머리맡에 대고 어머니는 이따금 "할아버지는 우리 눈에는 안 보이지만, 늘 옆에 계신다."라고 나지막이 이야기하곤 했다. 그 말을 들으며 자란 아이에게 할아버지는 늘 함께 존재하는 가족이다. 아이의 마음은 여전히 오래도록 못 만난 할아버지를 품어줄 수 있을 만큼 아름답다. 어린이날 마트에 가서 온갖 장난감에 침흘리고 있을 때는 그저 어리기만 한 줄 알았는데.
떠났다고 생각한 이는 떠나지 않았다. 동심을 가진 이의 마음속에서는 늘 함께 살아 숨쉰다. 5월은 잃어버린 동심, 어린이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다시 찾아오기 위한 계절인가. 그래서 신은 이렇게 아름다운 날씨를 선물해 주셨는지도 모르겠다.
"그래 맞다, 아빠가 틀렸네. 할아버지도 출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