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어느 60대 부부 이야기

<미스터트롯>이 소환한 아버지 노랫소리

by 자민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초반부에 조정석이 노래방에 가는 장면이 나온다. 어느덧 마흔이 된 익준이 아들 우주와 함께 노래방 앞에 서 있는 장면을 보며 나도 덩달아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러고보니 노래방에 안 간지 십 년은 되었다. 한때 나도 노래 좀 했는데... 드라마에 나오는 OST 오리지널 넘버들 다 좋아하는데. 이승환도, 쿨도, 베이시스도.


나름 친구들과 함께 한창 임재범과 토이를 부르며 목청을 뽐내던 중고교 시절에도 노래방에만 가면 가족들은 '너가 노래를?' 이라는 반응을 보이곤 했다. 우리 가족들 뿐 아니라 명절때 친척들과 함께 노래방에 가도 대개 비슷한 반응이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건 가까운 어떤 이 때문에 내 노래실력에 대한 상대적 평가절하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다름아닌 아버지.


아버지는 노래방에만 가면 마이크를 놓을 줄을 몰랐다. 90년대 노래방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전에는 거짓말 좀 보태서 참석하는 환갑잔치 칠순잔치마다 초대가수 급으로 대우를 받곤 했다. 구성지게 가락을 잘 뽑았다. 레퍼토리도 많았다. 내가 잘 모르는 오래된 노래들이 대부분이었기에 그닥 관심은 없었지만.


트로트 오디션 <내일은 미스터트롯>을 방송이 끝나고 한참 후에서야 찾아보게 되었다. 프로그램의 존재야 진즉 알았지만 내가 딱히 좋아하는 장르는 아니어서 어머니가 목요일마다 TV 앞을 지키며 본방사수할 때 슬쩍 오며가며 보는 정도였다. 임영웅과 영탁이 노래하는 장면들을 온라인으로 다시 재생해 보면서 되먹잖은 고정관념으로 인해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 많은 순간들을 놓쳤다는 것을 깨닫고 무릎을 쳤다.


그제서야 얼마 전 고모가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그 나이대 어르신들이 다들 그렇듯 아버지 형제분들도 <미스터트롯>의 열성팬들이었다. 한창 프로그램이 방영되던 시절에 만났던 고모는 방송을 보고 있노라면 큰오빠가 너무 생각난다며 눈물지었다. 큰오빠가 자주 부르던 노래들을 젊은 가수들이 자꾸 TV에 나와 부른다고.


사람의 기억력은 생각만큼 또렷하지 못해서, 떠난 사람의 육성은 점점 풍화되어 꿈처럼 뇌리에서 사라진다.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지 만 세 해가 넘은 지금은 애써 떠올리지 않으면 평상시 그의 목소리가 희미하다. 그런데 <미스터트롯>에서 나오는 노래들을 듣고 있자니 내게도 아버지 노랫소리가 돌아왔다. 목을 긁어 힘차게 끌어올리던 그의 탁성이 또렷하게 내 귀로 박혔다. 사라지지 않고 내 머릿속 어딘가 고이 잠들어 있었던 거다. 다들 비슷한 경험을 하셨던 건가. 고모들도, 삼촌들도, 그리고 말은 안했지만 어머니도.


신성의 <녹슬은 기찻길>을 들으며 아버지의 <녹슬은 기찻길>을 같이 듣는다. 세상 유일하게 나만이 들을 수 있는, 내 머릿속 그의 노래. 한참 오래된 곡이라고 생각했는데 원가수인 나훈아가 이 곡을 낸 것이 1981년, 이십 대 젊은 아버지가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을 때다. 생전에 노래에 한을 담아 부르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아버지의 수많은 노랫가락 속에서도 유난히 저 노래가 머릿속에 남았던 이유는 무엇이었나. 소주 한 잔 걸치고 당신의 청춘시절 노래를 불러가며 아버지는 사십대의, 오십대의 고단한 삶을 버텨나가고 있었던가.


임영웅은 본선 경연곡으로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를 다시 부른다. 임영웅의 노래를 듣는 순간 꽤 오래도록 이 노래가 내 플레이리스트 속 한 자리를 차지하겠구나 직감했다. 전에는 왜 미처 몰랐을까.


수십 번도 더 들었을 김광석의 이 노래가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어머니의 송가인 것을.


어머니는 아직도 휴대폰에 오래된 노래들을 넣어놓고 시간될때 듣곤 하신다. 아버지와 함께 자연을 오가며 함께 듣던 노래들. 몇해 전 산에 가서 노래 듣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으셨을 때, 두 분 휴대폰에 귀찮다는 듯 대강 다운로드해드렸던 백여 곡의 노래들이다. 몇 달 전 휴대폰을 바꿀 때 어머니는 수천 번은 족히 들었을 그 노래들의 안위부터 살폈다. 없어지면 안될 소중한 보물인 것마냥.


그때는 몰랐고, 이제야 안다. 아버지 노랫소리를 누구보다 머릿속에 많이 저장해뒀을 어머니에게 그 노래들은 그냥 여느 MP3가 아니라, 아버지의 목소리를 이승으로 소환하는 마법의 도구들이라는 것을.


매주 목요일만 기다렸던 어머니가 임영웅의 노래를 놓쳤을 리 없으니 틀림없이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도 들으셨겠지만, 아직은 차마 듣고 어떤 마음이셨는지 물을 용기가 나지 않는다. 시간이 좀 더 흐르고 나면, 아버지의 노랫가락조차 희미해질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그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물어볼 요량이다. 세상이 어찌나 변했는지 이제 60대 노부부란 말은 없고 80, 90대나 되어야 가히 노부부라 할 만 하니 아마 그때쯤이 되지 않으려나.


그냥 어머니 휴대폰에 미스터트롯 노래들만 말없이 몇 곡 넣어드려야겠다.


"다시 못 올 그 먼 길을 어찌 혼자 가려 하오

여기 날 홀로 두고 여보 왜 한 마디 말이 없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keyword